석곽묘는 일명 ‘돌덧널무덤’이라고도 부르는데, 지하에 구덩이를 파고 자연 할석이나 자갈돌을 쌓아 직사각형의 공간을 마련한 무덤이다. 여기에 시신을 직접 묻거나 목관에 넣어 매장한 후 판돌이나 나무를 이용해 뚜껑을 덮었다. 현재 전시되고 있는 석곽묘는 수원 이목동에서 발굴한 것을 옮겨온 것으로 수원지역에서 처음으로 발굴된 통일신라시대의 석곽묘이다. 머리 받침석이 있고, 회청색의 연질 완과 연황색의 연질 대부완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의하면 1796년(정조 20) 정조가 수원 현륭원의 행차길 중요지점마다 표석을 세우라는 내용이 있다. 총 18개의 표석을 세웠었는데, 현재는 괴목정교(槐木亭橋), 상류천(上柳川), 하류천(下柳川), 안녕리(安寧里), 만년제(萬年堤) 등 5개가 남아 있다.
2009년 5월 관리가 어렵고 훼손의 위험이 있어 수원박물관으로 이전하여 전시하고 있다.
수원시 화서동에서 2008년 수원박물관으로 옮겨온 석불로 근래까지 동래정씨 집안 여인들에 의해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에 제의가 이루어졌었다. 삼존상으로 본존불과 좌우협시 보살입상으로 구성되었으며, 본존상의 머리 뒤쪽에는 원형 두광(頭光)이 표현되었다. 전체적으로 불상의 몸 곳곳에는 채색한 흔적이 남아있고, 큼직한 이목구비에 미소를 머금은 자비로운 인상을 주고 있다. 과감하게 생략된 옷주름, 연화대좌의 소박한 형태와 세부적인 조각 수법 등에 비추어 볼 때 고려중기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정씨 약사불로 불렸으나, 약사불로 볼 수 있는 도상적 근거가 미약하여 2021년 9월 8일 수원 화서동 마애삼존불상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정려문은 충신․효자․열녀․ 등 타인에게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의 행적을 널리 알리고자 연고가 있는 마을 입구나 집 대문 앞에 나무로 만들어 세우던 붉은 문이다. 일명 정문(旌門), 작설(綽楔), 홍문(紅門)이라 한다.
전시하고 있는 정려문은 수원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류태명(柳泰明, 1666~1716)과 류의(柳誼, 1734~1709)의 효자 정려문으로 전주류씨 문중에서 박물관에 기증한 것을 복제한 것이다.
수원 칠보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던 금곡동 고인돌은 잘 다듬은 받침돌을 세워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경기남부 지역에서 가장 큰 덮개돌을 얹은 탁자식으로 권선구 호매실지구 택지개발에 따라 2009년 박물관으로 옮겨와 전시하고 있다.
이전 복원하면서 원래 있었던 좌우 받침돌과 동일한 형태와 질감으로 앞뒤 받침돌을 모형 제작하여 보완 설치하였다.
이 움집터는 청동기시대(약 B.C 1,000년 전) 수원시 금곡동(옛 중촌마을이 있던 낮은 언덕)에 자리하던 것을 모형복원 한 것이다. 움집터 주변으로는 20여 기의 거의 동일 시기의 움집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이 움집은 이른바 화재주거지로, 당시 사용하던 생활용구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청동기시대 수원 지역의 생활상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움집터 안에는 화덕 3개, 기둥구멍 28개, 벽 구멍 12개, 저장 구덩이 8개가 남아 있으며, 곡식이나 물을 담아 주는데 사용하는 항아리와 바리 등을 비롯하여 나무를 찍거나 가공하는데 사용하는 도끼, 무언가를 베는데 사용하는 돌칼, 곡식의 껍질을 벗기거나 빻는데 사용하는 갈판과 갈돌, 이밖에 돌화살촉과 대롱옥 등이 출토되었다.
한편, 움집터 안에 생활용품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당시 움집터 내에 전염병이 돌아 일부러 불을 내고 폐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 031-228-4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