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체의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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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체의 종류
문자는 특성상 모든 사람이 편리하게 사용하기 위한 실용적인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글자 하나하나의 조화와 어울림을 예술적 아름다움으로 감상하려는 미적인 요구 아래 다양하게 변천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문자의 표현 방법에 있어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서체가 만들어지고 발전하였으며 때로는 크게 유행하였다가 곧바로 사라지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 한자의 서체는 전서(篆書), 예서(隸書),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의 다섯 가지로 크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한글의 경우에는 초기의 인쇄체인 판본체(板本體)와 궁중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필사체로서 발달한 궁체(宮體)가 있습니다. 서체의 종류와 여러 가지 표현 방법을 역사적 배경과 함께 관심을 갖고 감상한다면 보다 깊이 있고 풍부한 서예 감상을 할 수 있습니다.

전서(篆書)

이양빙(李陽冰) 글씨 집자(集字) 사진
박명원신도비명(朴明源神道碑銘)
1790년 세움
이양빙(李陽冰) 글씨 집자(集字)
전서는 예서와 함께 진한(秦漢) 시대까지 널리 사용된 서체로서 고문(古文), 대전(大篆), 소전(小篆) 등의 종류가 있습니다.
고대에는 길흉을 알아보기 위해 점을 치는데 그 점괘를 거북이 등뼈나 소뼈 등에 새기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을 갑골문(甲骨文)이라고 합니다. 또 솥이나 종 등의 금속에 글씨를 새기기도 하는데 이는 종정문(鍾鼎文)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서체들은 고문(古文)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서는 쓰임에 있어서 간략화 되거나 정비되기도 하였는데 그중 소전은 진나라 때 체계적으로 정비가 이루어져 이후에는 전서의 전형으로 여겨져 오고 있습니다.
전서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마지막 단계의 서체인 소전은 중후하고 안정감을 주는 글자체입니다. 비석의 두전(頭篆: 비석의 머릿부분)에는 통상적으로 전서를 사용하였으며 전통시대 뿐만 아니라 요즘에도 도장을 새길 때 전서를 이용하는데 이는 전서의 중후한 맛과 권위적인 멋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서는 초서, 행서, 해서와 같은 쓰기 편리한 서체가 출현하자 이어져 나온 예서와 함께 장식적이고 의례적인 용도로만 사용되었으며 큰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예서(隸書)

김정희(金正喜) 예서(隸書) 사진
소식(蘇軾)
십팔대아라한송(十八大阿羅漢頌)
19세기 / 김정희(金正喜)
진나라 때 성행했던 전서의 번잡함을 없애고 한나라 때 널리 유행했던 서체입니다. 예서라는 명칭은 당시의 기준 서체였던 전서에 예속된 부차적인 서체라는 뜻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예서는 물결처럼 흔들리는 파세(波勢)와 갈고리[鉤], 파임[磔]과 같은 필세가 강하게 나타나는데 특히 동한시대의 예서를 팔분(八分)이라고 별칭(別稱)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전서의 필의가 많이 남아있는 서한시대의 예서를 고예(古隸)라고 통칭하기도 합니다.
또 예서와 관련하여 고대 서체의 하나였던 비백(飛白)이 있습니다. 비백은 예서를 마치 흩날리듯 가볍게 쓰는 것으로 동한(東漢)의 영제(靈帝)때 채옹이 홍도문을 나서는데 때마침 공인(工人)이 백토를 칠하는 납작 붓으로 글씨 쓰는 것을 보고 비백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주로 궁궐 건물의 편액 글씨로 사용되었으며 당나라때까지 장식 서체로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당나라 때의 비백 필적을 살펴보면 행서나 해서에서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서체로서의 명칭보다는 쓰는 기법에 따른 명칭으로 여겨집니다.

해서(楷書)

한호(韓濩 해서(楷書) 사진
서경덕신도비명(徐敬德神道碑銘)
1585년 세움 / 한호(韓濩)
해서는 여러 서체 가운데 가장 후대까지 정리된 서체입니다. 한나라 말에 발생하기 시작하여 위진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발달하였고, 수(隋)를 거쳐 당나라 초기에 들어와 완비되었습니다. 옆으로 길고 납작한 형태의 예서식 짜임에서 점점 정방형의 짜임으로 변화되었고, 파세(波勢)나 갈고리[鉤], 파임[磔] 등이 점점 단정해져 곧은 형태의 규범적 필획으로 정리되었습니다.
해서 중에서도 방필(方筆)의 방정(方正)한 골격이 잘 드러나며 호방하고 웅건한 풍격을 보이는 이같은 서체를 흔히 육조체(六朝體)라고 통칭하며 북위시대의 시대적 풍격도 공유하고 있어 서예사에는 ‘북위서(北魏書)’라고도 합니다.

행서(行書)

이황(李滉) 행서(行書) 사진
이백(李白)
송하빈객귀월(送下賓客歸月)
16세기 / 이황(李滉)
흔히 해서를 조금 흘려서 이어지듯 쓰는 서체를 행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행서는 원래 해서나 초서와 함께 예서로부터 출발하여 한나라 이후 독립 서체로 발전하였으며 실제 해서에 앞서 정비된 서체입니다.
행서는 초서와 함께 전서나 예서에 비해 좀더 자유롭고 비정형이기 때문에 글씨의 예술적 영역을 넓히는 주된 역할을 맡아 왔습니다. 삼국시대 위나라의 종요와 동진(東晋)의 왕희지, 왕헌지는 오랜기간 동안 서예사의 전형적 모범으로 여겨져 왔으며, 그들의 해서와 함께 원명대(元明代)의 대표적인 복고주의 서예가들에 의해 고법의 핵심으로 귀중하게 여겨져 왔습니다.

초서(草書)

이광윤(李光胤) 초서(草書) 사진
봉신윤우천령형지경
(奉贐尹牛川令兄之京)
1604년 / 이광윤(李光胤)
초서는 여러 서체의 변화 과정속에서 궁극점에 도달한 서체입니다. 초서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고고학적 유물을 통해 살펴보면, 진나라 말이나 한나라 초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위진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정비되었다고 합니다. 그 변화는 장초(章草)·금초(今草)·광초(狂草)의 순서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장초는 한나라 때의 통용 서체인 예서에서 나온 것으로 점획을 줄이거나 잇고 운필을 좀더 빠르고 간략하게 정리한 것입니다. 일부 글자에서 예서의 파세(波勢)처럼 획을 넓게 펼친 운필을 보이는 초서입니다.
금초는 장초가 점점 변화하여 대략 동한시대 말이나 삼국시대에 걸쳐 정비되었고 그후 왕희지 등에 의해 정형화된 것으로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초서를 말합니다. 장초에서의 간략하고 반복적인 운필, 글자 사이의 드문 연결, 점을 강조하는 특징들이 보다 긴장감 있고 주의 깊게 정비된 운필법에 의해 표현됩니다. 또 두 글자 이상을 연결시키는 방법이 진전되는 등 점획의 연결과 운필의 흐름이 중시됩니다.
광초는 장법, 결구, 획법 등에 있어 변화의 폭이 매우 큰 방일(放逸)한 초서를 말합니다. 한 행에 대여섯 글자로 크기를 번갈아 써가다가 간간이 네 글자로 변화를 일으키고, 뒷부분에서 두 행의 공간을 세 글자로 처리하거나 세 행의 공간을 단지 두 글자로 처리하기도 하며, 각각의 행을 반듯하게 쓰기도 하고 한쪽으로 삐뚤게 쓰기도 하는 등 장법이 매우 변화로운 초서입니다.

판본체(板本體)

훈민정음 국보 제70호 판본체(板本體) 사진
<훈민정음> 국보 제70호
1446년 / 간송미술관 소장
[문화재청 홈페이지 사진 제공]
한글 창제 직후에 나온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 등의 판본에 사용된 글씨체를 말합니다. 오래된 글씨체라는 의미에서 고체, 또는 훈민정음을 본 받아 쓴 글씨라는 의미에서 ‘정음체’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혼서체(混書體)

월인석보 보물 제745-11호 혼서체(混書體) 사진
<월인석보>보물 제745-11호
1459년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문화재청 홈페이지 사진 제공]
국어와 한자를 섞어서 사용함으로 혼서체라고 하며 ‘필사체(筆寫體)’라고도 합니다. 판본체의 획이나 글씨의 짜임이 엄격하고 도식적이어서 자연스럽게 쓸 수 있도록 변모한 서체입니다. <월인석보> <두시언해> 에 사용된 글씨체입니다.

궁체(宮體)

인선왕후(仁宣王后)  어서(御書) 사진
신한첩(宸翰帖 보물 제1629-1호)
에 실린 인선왕후(仁宣王后)
어서(御書)
17세기 /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문화재청 홈페이지 사진 제공]
1446년(세종 28) 《훈민정음》이 반포된 뒤 궁중에서 궁녀들이 쓰기 시작하면서 발전했기 때문에 궁체라는 명칭이 생겼습니다. 한글 창제이후 한글 판본체(板本體)가 읽기는 쉬워도 쓰기 어려우므로 차츰 쓰기 편한 필사체로 변화 발전하면서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궁체는 글씨의 선이 곧고 품위가 있어 여성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였으며 내서(內書)라고도 불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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