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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칠과 최승규
등록일 2010.07.27 필자 김경표
시대구분 고려 원본
내용 김칠(金七)과 최승규(崔承珪)는 '고려사'수주(수원의 고려시대 명칭)관련 기사에서 그 이름을 살펴볼 수 있다. '고려사'지리지 수주기사에는 수주가 고구려의 매홀(買忽)이었으며, 신라 경덕왕 때 수성군(水城郡)으로 고쳐졌고,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남방을 정벌할 때 그 군(郡) 사람인 김칠과 최승규가 200여명을 거느리고 태조에게 귀순하여 공을 세워, 후에 그 공으로 수주로 하였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다.

940년(태조 23) 봄 3월에 주, 부, 군, 현의 명칭을 개정했다고 하니, 이 당시 수성군이었던 명칭이 수주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김칠과 최승규가 고려 태조 왕건에게 귀순한 시점은 언제일까
? 왕건이 궁예의 신하로 있었던 900년, 궁예가 왕건에게 명령해 광주(廣州)·충주(忠州)·청주(淸州) 등 3개 주와 당성(唐城:경기 남양)·괴양(槐壤:충청 괴산) 등 군·현을 정벌하게 해 이를 모두 평정, 그 공으로 왕건에게 아찬 벼슬을 줬다고 한다
.
당시는 후삼국시기로 이미 힘을 잃은 신라는 지방을 장악할 수 없었으며, 후백제의 견훤과 후고구려의 궁예가 힘을 겨루는 시기였다. 현재의 경기서남부는 당시 군사적․경제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을 왕건이 평정하게 되면서 당시 수성군의 호족이었던 김칠과 최승규가 귀순을 하여 경기남부·충청 지역 평정을 도왔을 것이라 추측할 수

다. 그렇다고 이들이 왕건의 휘하로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궁예의 후고구려에 편입됐던 것이다. 하지만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918년)했을 때도 김칠과 최승규는 왕건을 지지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건국 초기에는 궁예를 지지했던 지방 호족들이 상당히 많았고, 그들이 고려에 귀순하는 시점이 조금씩 다르며, 건국 초 각 지역에서 고려에 반기를 든 반란이 일어났던 점을 생각해본다면 김칠과 최승규는 권력의 이동에도 고려 태조를 믿었고, 그 결과 940년(태조 23) 수성군은 수주로 명칭이 바뀌게 됐다. 이때의 명칭 개정은 단순히 명칭만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940년(태조 23)은 태조 왕건을 도와 통일을 이룬 개국 공신들을 치하하고, 역분제(役分制) 제정, 향직개편 등의 조치가 취해지는 왕권강화의 시기로써, 국가 권력이 확립되고 고려시대 향촌사회 지배 특징이 나타나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김칠과 최승규도 삼한공신으로 등제됐던 것으로 보인다. 12세기 고려 수주 출신의 최정 묘지명(崔精墓誌銘)에 나타난 ‘삼한공신(三韓功臣) 대상(大相) 김칠’이라는 기록을 통해서 이를 짐작할 수

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고려 초기 체제 개편 과정에서 김칠과 최승규의 공로에 의해 수성군(水城郡)에서 수주(水州)로의 명칭 개정은 단순한 지명 변화가 아닌 것이다. 수주의 지위가 승격됐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후 1018년(현종 9) 지방체제가 확립될 때 수주가 경기서남부 대부분을 속현으로 관할 할 수 있었

기반이 됐다. 아쉽게도 고려 초기 개국공신이었던 김칠과 최승규의 이름은 이후 '고려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수주최씨 가문의 묘지명을 통해 그들의 성장을 추적해 볼 수 있다. 그 중 최사위는 내사령에 올라 현종 묘정에 배향됐고, 그의 아들과 손자들이 대를 이어 고위 관직을 역임했다. 또한 최자성이 재상의 지위에 오르는 등 수주최씨 가문은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고위 관직으로 진출하면서 문벌귀족의

열에 오르게 됐다. '고려사'와 묘지명의 기록에 나타난 수주최씨 가문 사람들이 최승규와 직접적인 관계가 드러나지는 않지만 신라 하대부터 정착돼오던 성씨의 본관제와 이들의 출신지를 통해 같은 가문임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수주최씨 가문이 문벌귀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 건국 초기 김칠과 최승규가 개국공신에 오른 영향으로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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