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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희식
등록일 2012.08.13 필자 이동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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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희식(車喜植)은 1870년 11월 10일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에서 출생하였고, 봉습(奉習, 鳳習), 춘섭(春習) 등의 이명을 가지고 있었다. 현저동에서 출생한 이후 줄곧 수원군 장안면 석포리에서 생활하였고 부인 이씨와의 사이에 5남 1녀를 두었다. 3․1운동 당시에는 우정면 주곡리에 거주하였다.

차희식은 성격이 활발하고 사교술이 높아 여러사람들과 교유가 많았고, 힘도 장사였다고 한다. 차희식의 부인은 양영대군파 전주이씨로서 구술리에 거주하였던 집안으로 알려져 있다. 차희식이 자라고 생활한 석포리와 주곡리 주민들은 대부분이 유교를 숭상하였고, 대부분 연안 차씨와 장씨 집안들로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석포리 마을에는 연안 차씨들이 100여호 모여 살면서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이 지역은 조선시대 이시애의 난 때 순직한 강열공의 사당이 있어 전통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내재되어 있었다
.
차희식의 고향과도 같은 우정면과 장안면은 경기도 서남단에 위치한 반도로 예부터 세분의 정승(김상로․정태화․이정구)을 배출했다 하여 삼괴(三槐)지역으로 불렸다. 조선후기 이 지역은 남양군 압정면(우정면), 장안면으로 있을 때 동리마다 서당이 있어 책 읽는 소리가 계곡을 울려 퍼질 정도로 어느 지역 보다 교육과 문화의 수준이 높았던 곳이

다. 차희식은 전통적인 유교적 분위기 속에 교육을 제대로 받지는 못했지만 누구보다도 전통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소양을 갖추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3․1운동 당시 49세(판결문 44세)로 이 지역의 장년층으로서 마을의 젊은이들을 통솔할 수 있었고, 어린 시절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 농민군의 활동과 의병운동을 지켜

아왔다. 수원지역의 3․1운동은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사의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곳이다. 수원지역의 3․1운동 중 4월 3일 우정면과 장안면의 연합시위는 주민 2천 5백여명이 참여하여 일제의 말단행정을 수행했던 우정면사무소와 장안면사무소를 파괴하고, 화수리 주재소를 파괴하며 일본 순사 가와바다(川端豊太郞)를 처단하는 등 격렬한 항쟁의 기치를 올렸던 대표적인 3․1운동의

항쟁지이다.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3월 27일에 보를 쌓는 일로 구장회의가 열려 만세운동이 사전 계획 되었다. 사실 우정․장안면 만세운동의 주동자들은 구장(里長)들이었다. 백낙렬은 수촌리 구장이면서 장안면의 구장대표이기도 했다. 차병한도 석포리 구장의 신분이었으며, 주민들을 동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구장들은 누구보다도 향촌조직을 쉽게 통솔할 수 있었으며, 지역민들의 일제 수탈에 대한 정서와 감정을

알고 있었다. 구장회의에서 석포리의 구장 차병한이 만세를 부르자고 했으며, 또 4월 3일에도 시위전에 차병한과 차병혁 등이 장안면사무소에 가서 장안면장 김현묵에게 우정면 사람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했다. 시위주동자들은 이미 계획되어 있던 3․1운동에 면장

동참을 촉구했다. 4월 3일 오전 11시 장안면사무소에 약 2백여명이 모여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장안면장 김현묵을 앞세워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쌍봉산을 향하여 출발했다. 당시 주곡리에 살고 있던 차희식은 주로 시위 군중들의 앞에서 직접 행동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에 동참하였다. 차희식은 행동대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있던 수일 뒤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유서방으로부터 만세운동

대한 소식을 들었다.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을 주도한 차병혁, 차병한 등과는 일가였으며, 차희식이 한 항렬 높은 어른이었다. 차희식은 동지인 장제덕, 장소진, 김흥식 등과 함께 행동대로서 만세운동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차희식은 1915년 도박죄로 태형 60의 처분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결과로 경성복심법원에서 태형 판결을 취소 받고 징역 3개월의 집행을 마쳤었다. 그 후 가와바다 순사가 부임한 이래 도박을 하지 말라는 권유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항상 감시를 받고 있었다. 가와바다 순사는 도박 단속을 핑계로 동민들을 감시하며 통제하고 있었다. 사실 전통적으로 농민들은 농한기에 서로 모임이나 회합을 가지면서 단순한 놀이로 도박을 하기도 했는데, 일제는 이를 풍속죄로 단속하면서 동민들의 모임과 회합 속에서 일제에 대항하는 분위기를 억누르려고 했다. 실질적으로 풍속죄로 단속되어 잡혀가 벌을 받았던 사람들은 형을 마치고 돌아와 적극적인 항일의지를 불태웠으며 동민들의 영웅이 되었고, 3․1운동

에는 운동의 주동자가 되었다. 차희식은 차병한․차병혁과 함께 이영쇠 등에게 장안면 사무소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한 계획을 알려서 인근 주민들에게 몽둥이를 가지고 면사무소로 모이도록 연락하는 한편, 자신은 장제덕, 장순명, 장봉래, 이치덕 등과 함께 석포리 주민들에게 “오늘 한국독립만세를 외칠 작정이니 각 집마다 남자 1명 이상이 나오라”고 만세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하면서, 주곡리 구장 한규명(한규회)에게 “동리 사람에게도 전달하여 모두 나오기로 되어 있으니, 당신도 쌍봉산까지 나오라”하여 동리 뒷산에서 만세를 부르고 우정면 주곡

와 석포리 주민들의 선봉에 섰다. 차희식은 군중 200여명이 모인 장안면 사무소에서 선두에 서서 투석과 몽둥이로 면사무소 건물을 부수고 공문서를 파기하였다. 점차 군중이 1천여명으로 늘어나자, 다시 이들을 인근의 쌍봉산으로 인솔하여 그 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으며, 이어서 차병혁․차인범과 함께 2천여명으로 늘어난 만세시위 군중들을 인솔하여 우정면 사무소로 가서 그 곳의 건물을

괴하고 집기류와 공문서를 파기하였다. 그리고 시위 군중들과 함께 화수리에 있던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고 불태워버렸다. 이때 주재소 안에 있던 일본인 순사 가와바다가 권총을 발사하며 도망가자, 장소진 등과 함께 추격하여 이봉구 등 수십명의 군중과 함께 그를 격살시키는 등, 격렬하게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세운동 이후 잠시 산속으로 도피해 있던

중 4월 5일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0년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살인․방화와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15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9년 2개월 만에 출옥하였다. 출옥한 뒤 대부분은 서울 현저동에서 기거하다가 69세의 나이로 1939년 10월 18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은 2천 5백명이라는 인원이 참여한 것으로 이 지역의 모든 주민들이 만세운동에 동참한 결과였다. 그것은 지역 주민들이 일제의 식민정책에 대한 피해를 절감하고 있었으며, 백낙렬, 차병한 등의 구장과 차희식 같은 마을 지도자들의 투철한 항일 의식이 존재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만세운동의 선봉에 서서 주민들을 격려하고 이끌며 조국 독립의 의지를 불태운

선열들의 정신은 오늘날의 큰 교훈으로 남아있다. 정부에서는 차희식의 공훈을 기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또한 2010년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현재 차희식의 묘소는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치되어 있고, 3․1운동 당시 기거하였던 집이 현 화성시 우정읍 주곡리 81번지에 일부를 제외하고는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 상태로 남아있어 고인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느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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