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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렬
등록일 2010.07.28 필자 이동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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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렬 선생은 남양군 팔탄면 고주리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통정대부의 벼슬을 지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수촌리 백낙렬과 힘을 합해 향남․팔탄면에서 농민군을 모집하여 수원 고석주 접주 휘하에 들어가 활약하였다. 1904년 갑진개혁운동이 일어나자 고주리와 제암리 교인들과 함께 상투를 자르고 개혁운동에 앞장섰다. 또한 그는 고주리 천도교 전교사로서 사랑방을 전교실로 개조하여 고주리․제암리 주위의 교인들을 시일마다 모아놓고 교리를 가르쳤다. 인근의 유학자이자 발안장터 만세운동에서 순국한 이정근과도 자주 만나 교유하였다. 일제강점기 수원지역의 천도교는 교세가 매우 강했는데, 수원교구 산하의 남양교구가 성미 실적 전국 제1위를 할 때에도 김흥렬은 백낙렬과 함께 성미를 당나귀에 싣고 중앙총부에 상납할 정도로 충실한 신자였다.

김흥렬은 김창식과 함께 1914년에 제7회로 105일간 연성수련을 했다. 김흥렬에겐 외동딸 김철화가 있었는데, 이 딸을 천도교 제4세 대도주 춘암 박인호의 며느리로 출가시킬 정도로 천도교의 핵심세력이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동생 김성열을 시켜 고주리․제암리 주위 부락 젊은 청년들을 규합하여 항일조직인 ‘구국동지회’를 조직하여 항일의식이 매우 투철한 인물이었다. 1918년 천도교에서 대교당 건축성금을 모금할 때 김흥렬은 자신의 논 3천평과 밭 3천평을 팔아 중앙총부에 헌납하였고, 인근 부락 교인들에게도 헌납을 권유하여 모금한 후 총부로 보내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해나갔다.

김흥렬은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을 주도한 백낙렬과 함께 뜻을 같이하여 수원지역 3․1운동의 선봉장 역할을 하였다. 고주리․제암리․가재리 등의 만세시위를 앞장서서 주도하였고, 발안장터에서도 이정근․안정옥 등과 함께 군중들을 지휘하여 항일의 기치를 높이 세

다.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은 계획적이면서 조직적으로 일어나 일제 식민지배의 말단 행정기구였던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주재소를 공격하여 갖은 악행을 일삼던 일제의 주구 일본순사들을 처단하였다. 이에 일제는 가옥들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살상하는 보복적 행동을 감행했다. 일제는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수색한다는 핑계로 살인과 방화, 구타 등을 벌이며 ‘제암리 학살’이라는 엄청난 만행을

질렀다. 일제는 1919년 3월 31일 발안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있은 후 헌병과 경찰을 동원하여 혼성부대를 편성하고 만세운동에 참여한 주민들의 검거작전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4월 3일 화수리에서 일본 순사 가와바다가 처단되자 토벌작전은 더욱 더 거칠어졌다. 일제 헌병과 경찰은 시위주동자인 김교철과 백낙렬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야간에 수촌리 마을에 들이닥쳐 김교철, 차인범, 정순영, 이순모 등을 체포하였다. 그리고는 수촌리 전 가옥에 불을 지르고 많은 재산과 인명 피

를 입혔다. 또한 일제는 만세운동이 벌어진 상황이 내란과 같은 상태이기 때문에 3․1운동을 주동한 사람들을 모두 처단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4월 13일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의 아리타 중위가 이끄는 보병 13명이 발안에 도착하였다. 이들의 임무는 진압 작전이 끝난 발안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발안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지 않아 아리타는 제암리에 대대적인 진

을 시작하였다. 아리타는 4월 15일 부하 11명과 순사 1명, 순사보 조희창과 사사카 등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3․1운동의 주동자로 인정한 천도교도와 기독교도인 주민들을 제암리 교회에 불러 모았다. 그런 다음 그들 모두를 교회에 가둬 놓고 불을 질러 30여명의 고귀한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 아리타는 제암리 촌락의 대부분을 불을 질러 태워버리고 엄청난

살육을 자행하였다. 향남면 제암리는 발안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농촌으로 모두 33호의 농가가 있었다. 이 마을 주민들은 종교적 믿음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이전에 동학이 포교되어 고주리의 김흥렬을 중심으로 천도교의 포교가 많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1905년 선교사 아펜젤러의 전도를 받아 입교한 안종후에 의해 감리교가 전파되어 초가집의 교당이 제암리에 있었고, 인근 지역을 합하여 15

의 신자 집이 있었다. 제암리 여러 희생자들과 함께 김흥렬은 고주리에서 김성열, 김세열, 김주업, 김주남, 김흥복 등 가족과 함께 학살되었다. ‘제암리 학살 사건’으로 3․1운동을 직접적으로 이끌어 나갔던 많은 천도교도와 기독교도들이 일제 보복의 희생양이 된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91년 애국장을 수여 독립유공자로 포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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