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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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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후
등록일 2010.07.28 필자 이민식
시대구분 조선 원본 김후 원본파일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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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후 첨부이미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화성(華城)의 축성 사업은 정조대왕의 면밀한 주도아래 당대의 뛰어난 인물들이 대거 참여했던 세기적인 역사(役事)였다. 성역(城役) 사업 전체를 총괄하는 총리대신 채제공(蔡濟恭 1720~1799)과 성역 실무의 총책임자인 감동당상(監董堂上) 조심태(趙心泰)를 비롯해 도청(都廳) 이유경(李儒敬), 책응도청(策應都廳) 김노성(金魯成) 등이 당시 성역에 참여했던 주요 인물이다.

이때 수원에서 일찍부터 세거(世居)하던 토박이로서 화성성역에 가담해 별감동(別監董)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경기중군(京畿中軍) 김후(1751~1805)이다
.
김후의 본관은 해풍(海豊)이고 자는 광중(光仲)이며 증호조참판 김상걸(金相傑 1727~1798)의 아들이다. 해풍은 풍덕(豊德)의 또 다른 이름이며 경기도 개풍(開豊)의 옛 이름이다. 해풍김씨의 시조(始祖) 김숭선(金崇善)이 고려때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내고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貫鄕)을 해풍(海豊)으로 하게

다. 해풍김씨는 고려시대부터 경기지방에서 무반(武班)의 지위를 굳혀왔으며 조선시대에도 그 전통을 면면히 지켜왔다. 조선초 함경북병사(咸鏡北兵使)를 지내며 맹위를 떨친 김수종(金壽宗)을 위시해 경상우도병사(慶尙右道兵使)로서 삼포왜변(三浦倭變 1510년)을 진압한 김석철(金錫哲)과 1588년(선조 21) 여진족을 토벌한 북병사 김우추(金遇秋) 등이 해풍김씨의 대표적인

물이다. 김후는 이 같은 집안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또한 선조의 무덤이 대대로 자리잡고 있는 지금의 화성군(華城郡) 우정면(雨汀面) 일대를 어른들을 따라 성묘차 오고가며 훌륭했던 선조들의 모습을 그리며 자신도 그렇게 되겠다고 굳게 다짐하였다. 이렇게 김후는 무반의 길을 꿈꾸며 자라다가 드디어 형인 김명과 함께 무과 급제하고 관직에 진출함으로써, 해풍김씨의 무풍(武風)을 조선의 만천하에 드

리게 됐다. 김후는 21세의 매우 젊은 나이인 1771년(영조 47) 정시(廷試) 무과에 급제했다. 그리고 다음해 부사정(副司正)을 제수 받았으며 1773년(영조 49) 비변사(備邊司)의 무낭청(武郎廳)으로 재직시에는 열심히 근무한 것을 인정받아 왕이 특별히 6품으로 승

시켜 주었다. 또한 1774년(영조 50)에는 조선시대의 최고(最高) 군령기관(最高軍令機關)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도사(都司)에 임명돼 군의 주요 경력을 착

히 다져 나갔다. 한편 1775년 불과 26세의 나이로 왕의 시위(侍衛)와 전령(傳令) 등의 주요 업무 등을 담당하는 선전관(宣傳官)에 뽑히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 선전관은 일종의 무직(武職) 승지(承旨)의 구실을 하는 무관(武官)으로서 신분이 확실하면서 재능이 뛰어난 인물들 중에서 주로 선발했다. 이로 보면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그 능력을 인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김후는 정조가 즉위하게 되면서 더욱 중용돼 다양한 관력(官歷)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런데 김후의 경력을 살펴보면 정조가 수원 토박이 무반 가문 출신의 김후를 의도적으로 중용한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왜냐하면 김후가 군과 관련된 각종 경력을 쌓다가 1790년 이후부터는 특히 수원과 관련된 무반직을 많이 역임하기 때문이다. 이를 연대별로 열거하면 정조가 즉위하는 1776년의 7월에 훈련원(訓練院) 판관(判官)을 시작으로 이듬해 훈련도감(訓練都監) 파총(把摠)을, 1779년(정조 3)에는 경상남도 진주(晋州)의 영장(營將)을, 1780년(정조 4)에는 오위장(五衛將)을 거쳐 1785년(정조 9)에는 다대포첨사(多大浦僉使)를

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1790년(정조 14) 4월 드디어 경기 지역 군사 요충지중의 하나인 강화(江華)의 중군(中軍)이 됐으며 그해 12월 마침내 수원(水原)의 중군에 제수됐다. 이어서 1791년 당시 수원부 읍치(邑治)의 외곽을 호위하던 독성산성(禿城山城)의 중군을 역임한 후 1793년에는 경기(京畿) 중군이 돼 경기도 지역의 모든 군사 업무를 실질적으로 통솔하게 됐는데, 화성성역이

작되기 딱 1년 전의 일이다. 김후는 경기중군에 재직하던 1794년(정조 18) 2월에 화성성역의 별감동(別監董)에 임명됐다. 별감동이란 성역 등의 큰 공사가 있을 때 특별히 임명하던 감독관으로 성역 사업의 주요 직책 중 하나였다. 『화성성역의궤』에 의하면 김후는 별감동으로 총 886일을 근무하면서 개울을 파내는 준천(濬川) 공사를 비롯해 화홍문, 방화수류정, 동북성, 동장대 등의 건설을

감독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다. 한때 공사 도중인 1794년 9월에 독성(禿城) 중군으로 잠시 옮겼다가 다음해 윤2월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승진 임명돼 나갔지만 곧 경기중군과 독성 중군으로 다시 복직해 화성 성역이 완공될 때까지 맡은 바 임무를 다해 큰 공을 세웠다. 그래서 정조는 1796년 1월 22일 “독성 중군 김후는 그 공로가 몹시 크니, 우선 길이 잘든 숙마(熟馬) 1필을 특별

하사하라”는 전교를 내려 포상했다. 또한 정조는 수문(水門)과 동장대(東將臺)의 터를 닦기 전에 김후를 보내 그 토지 신령에게 제사를 올리게 했으며, 화성내에 건설한 성신사(城神祠)의 봉안제(奉安祭) 축문(祝文)도 짓게 했다. 이로 보면 김후는 무예 뿐만 아니라 문장력도 갖춘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정조도 이를 간파
해 그를 더욱 신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1797년 7월 화성 성역이 끝났음에도 김후를 재차 수원의 중군으로 다시 내려 보낸다. 아마 화성 신도시의 군사적 안정과 현륭원의 보호를 위해 김후를 임명한 것으로 판단된다. 화성성역 당시 감동당상 조심태(趙心泰)가 정조에게 올리는 보고서마다 김후의 이름 앞에는 항상 ‘본부인(本府人)’이라는 단어가 나왔으므로 정조는 일찍부터 김후가 수원사람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을 터이니, 이 같은 사실이 그를 신임

게 된 원인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정조는 이듬해 2월이 돼서야 모든 상황이 안정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했는지, 김후를 승급시킴과 동시에 황해병사(黃海兵使)로 내 보낸다. 이때 장궁(長弓), 장전(長箭), 편전(片箭) 등을 함께 하사하며 그간의 노고를 치하했다. 정조 사후에 김후는 1801년 내금위장(內禁衛將)만 잠시 지냈을 뿐 뚜렷한 행적을 보이지 않다가 1805년에 죽으니 향년 55세였다. 묘는 선영이 있는 화성군 우정면의 적진(赤津)에 마련됐다. 후손가에는 1796년경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초상화가 남아 있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면 눈빛은 형형해 광채가 나는 듯하고 풍채는 무장답게 위풍당당하게 천년바위를 대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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