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자료실 > 수원의 인물
 

수원의 인물

게시물 상세보기
채제공
등록일 2010.07.28 필자 이동근
시대구분 조선 원본 채제공 원본파일 다운로드
내용
채제공 첨부이미지

수원지역의 문화를 빛내고 세계적 도시로 발돋움하는 가장 중요한 문화유산은 역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화성(華城)’이다. 우리는 화성성역화 사업을 이야기할 때 제일 먼저 정조 대왕을 생각하고, 그다음은 두말할 것 없이 바로 화성성역의 총 책임을 맡았던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을 떠올린다. 번암 채제공은 화성성역 당시 온 정열을 다 바쳐 새로운 도시의 탄생을 주도하였다. 번암의 정조대왕과 화성성역과의 인연은 현재 수원화성박물관에 채제공 후손들이 기증한 <번암 초상화>(보물 제1477호)와 문집 『번암집』, 정조 어찰(御札), 각종 전령(傳令)과 유서(諭書), 교지(敎旨) 등이 전시 및 보관되면서 이어지고 있다.

번암 채제공(1720~1799)은 1720년(숙종 46) 아버지 응일(膺一)과 어머니 이만성(李萬成)의 딸 사이에서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강(平康)이고 자는 백규(伯規)이며 호는 번암(樊巖) 또는 번옹(樊翁)이다
.
채제공은 15세인 1735년(영조 11)에 향시에 급제한 뒤 1743년 문과정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748년에 한림회권(翰林會圈) 때 영조의 탕평을 표방한 특명으로 선발되어 청요직인 예문관 사관직을 거쳤다. 1753년에는 충청도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균역법의 실시 과정상의 폐단 시정과 변방에 대한 대책을 진언하였다. 1755년 소론 강경파를 제거하려는 나주괘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문사랑(問事郞)으로 활약했고, 그 공로로 승정원 동부승지로 임명되었다. 이후 이천도호부사와 대사간을 거쳤고, 1758년 『열성지장(列聖誌狀)』에 참여한 공로로 도승지에 임명되

다. 이 해 채제공은 스승인 오광운을 이어서 청남(南人 淸論) 정파를 이끌었는데, 소론 준론정파의 지도자 이종성과 연대해 사도세자와 영조의 악화된 부자관계를 회복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던 중 세자를 폐위시키겠다는 비망기가 내려지자 도승지로서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 이를 철회시켰다. 이 때문에 후일 영조는 채제공을 지적하여 “진실로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고 정조에게 말했다

한다. 이후 사간원 대사간, 사헌부 대사한, 경기감사를 역임하던 중 1762년 모친상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 해 윤 5월에 결국 임오화변(壬午禍變,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1764년부터 개성유수, 예문관 제학, 비변사 당상을 거쳐 안악군수로 재임 중 다시 부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1767년부터 홍문관 제학, 함경도 관찰사, 한성판윤을, 1770년부터 병조, 예조, 호조판서를 역임했고, 1772년 이후 왕세손의 보호를 담당하는 세손우빈객과 국가 재정의 핵심 부서인 공시당상(貢示堂上
)
을 맡았다. 채제공은 1775년 평안도 관찰사로 임용되었다가 내직으로 돌아온 뒤에 약방제조가 되어 국왕 영조의 병간호를 담당했는데 특별한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1776년 3월 영조가 승하하자 국장도감 제조에 임명되어 행장(行狀), 시장(諡狀) 및 어제(御製), 어필(御筆)을 편찬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이어 사도세자 죽음에 대한 책임자들을 처단할 때 형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로서 옥사

처결하였다. 채제공은 정조 즉위 직후부터 착수된 개혁 정책을 충실히 보좌했다. 우선 정조의 특명을 받아 시노비(寺奴婢)의 폐단을 교정하는 조목을 마련했고, 그 공로로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를 제수 받았다. 이 시노비 조목은 국가가 노비를 찾아주는 노비추쇄관(奴婢推刷官) 제도를 없애고 시노비의 수를 점진적으로 감소시킴으로써 결국 1801년(순조 1)의 시노비 해

을 가능하게 했다. 1780년(정조 4) 홍국영의 세도가 무너지고, 소론계 공신인 서명선을 영의정으로 하는 정권이 들어서자 홍국영과의 친분과 사도세자의 신원에 대한 과격한 주장으로 역적으로 처단된 인물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들과 흉연을 했다는 죄목으로 집중 공격을 받아 이후 8년간 서울근교 명덕산에

은거 생활을 하였다. 1788년 국왕의 친필로 우의정에 특채되었고, 이때 황극(황극)을 세울 것, 당론을 없앨 것, 의리를 밝힐 것, 탐관오리를 징벌할 것, 백성의 어려움을 근심할 것, 권력기강을 바로잡을 것 등의 6조를 진언하였다. 이후 1790년에는 좌의정으로 행정 수반이 되었고, 이후 3년 동안 독상으로 정사를 주도하였다. 이 시기에 탕평책을 계속 추진하기 위한 장치로 이조전랑이 가졌던 동료 추천제 및 당하관 독점 추천권을 다시 없애기도 했다. 또한 도성 안에서 물화를 독점 판매하려는 시전의 물가 조작이 계속되자, 신해통공 정책을 실시해 국가의 필수품을 담당하는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의 독점 판매권을 없애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1793년 영의정에 임명되었을 때는 전해 윤 4월에 있었던 영남만인소에서와 같이,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를 신원하기 위한 단호한 토역(역적이나 반도를 공격해 없앰)을 함으로써 새로운 의리를 세울 것을 주장했다. 또 같은 해 12월에는 정조가 화성 축성 사업에 대해, “사체가 중대해 대신이 전체를 규찰해야 하는데 이는 경이 아니면 다른 사람이 없다”며 그에게 총리대신의 책임을 맡겼다. 그는 이후 화성 건설에 전력을 다했고, 화성성역은 1796년(정조 20) 9월에 공사가 마무리 되고 10월 16일 낙성연(落成宴)이 열려 정조 대신 채제공이 참석하여 행사를 치루고 화성성역은 마무리 되었다. 이후 1798년 전후부터는 벽파를 중심으로 한 반대정파가 다시 서학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자, 그해 6월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사직했다. 다음해 1월 18일 운명을 달리하고 3월 26일 사림장(士林葬)으로 장례가 치러졌고, 정조가 친히 지은 제문이 내려졌다. 묘는 경기도 용인시에 있으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목록으로

고객만족도 조사 suwon museum opinion

☏ 031-228-4150

페이지 만족도 조사

평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