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자료실 > 수원의 인물
 

수원의 인물

게시물 상세보기
계섬
등록일 2010.07.28 필자 이동근
시대구분 조선 원본 계섬 원본파일 다운로드
내용
계섬 첨부이미지

요즘 대중적 관심을 끌고 있는 것 중 하나가 기생(妓生)이다. 기생은 역사 속에서 천민이었지만 우리에겐 가까운 대중적 역사이기도 하며, 해방 이후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옛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기생하면 천한 여성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릴지 모른다.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다른 사람을 위해 웃음을 흘리는 여성을 그리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 속에서 아름다움과 지성을 겸비한 황진이, 의기가 충만했던 논개 등을 먼저 떠 올리기도 한다. 기생은 다른 말로 ‘해어화(解語花)’라고도 부른다. 해어화란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으로 본래 미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를 데리고 연꽃을 구경하다가 양귀비를 가리키며 주위에 있는 신하들에게 “연꽃이 어찌 나의 해어화만 하겠느냐?”고 하여 생긴 말이었다
.
최근 기생이라는 주제로 ‘100년전 엽서 속의 기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전시회가 열리고 사진집 등이 만들어 지면서 대중적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또한 역사드라마로 제주도민의 영웅인 만덕(萬德)이라는 기생의 이야기가 방영되기 시작했다. 만덕은 기생의 신분으로 거상(巨商)이 된 뒤 평생 모은 재산을 제주도민을 위한 빈민구휼에 써 이름을 떨친 유명한 인물이었다. 정조대 화성(華城) 축성의 대역사를 총 지휘했던 번암 채제공이 만덕의 전기를 손수 지어 「만덕전(萬德傳)」이라는 글을 남겨 문집인 『번암집(樊巖集)』에 실려 있다. 채제공은 만덕의 일화 외에도 수원 화성 축성 당시 기생과 관련한 시문을 남겼는데, 화성행궁의 봉수당 진찬연 등에서 펼쳐진 기생들의 모습을 꽃과 같이 아름답다고 기록하고 있다. 번암이 남긴 시문을

면, 봉수당에서 진찬의를

익히다. 풍악이 울려 퍼지는데 기생은 꽃
같이 아름다워 채색주렴이 봉수당에
높이 걸려있네 땅의 신령함이
성대에 보효하고 하늘의 상서를 내려 우리
왕을 기쁘게 하네 남산 북두 같은
끝없는 복록 누리소서 금척 요도
의 상서 다함이 없으리
오래오래 이것을 잡수시고 덕을 기

는 속에 봄빛을 누리소서 화성 축성 당시 제일 큰 행사였던 화성행궁의 정궁인 봉수당에서 진찬을 연습하는데 기생이 춤을 추는 모습을 꽃과 같이 아름답다고 감탄하고 있다. 이렇듯 전통 사회의 풍류와 예악에서는 기생이 꽃과 같이 아름다워 빼놓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이제 그 봉수당 진찬연을 빛냈던 천민이지만 너무나 아름다웠던 화성부의 기생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앞서 얘기한 만덕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조선후기 영․정조대 노래 기생으로 이름을 날렸던 계섬(桂蟾)이라는 여인이 있다. 계섬은 1795년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진찬연이 열렸을때 화성부 소속의 기생으로 당시 나이 60세였다. 그녀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에 동원된 기생들을 총 지휘하며 잔치의 시작을 알리는 노래

제일 먼저 부른 여인이었다. 계섬은 아전 집안 출신으로 7세때 부친을 여의고 뒤이어 12세때 모친을 잃고 고아가 되어 노비가 되었다. 이후 16세때부터 창(唱)을 배워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 양반 사대가들의 잔치판에 불려나가며 명성을 얻기 시작한 그녀는 시랑 원의손의 노비가 되었다가 이정보(李鼎輔, 1693~1766) 수하에 들어가 그 문하의 추월(秋月), 매월(梅月)과 함께 당대 최고의 소리꾼이 되었다. 이정보는 영조때 대제학과 예조판서를 지낸 인물로 서울 종묘 동쪽에 있는 황교 다리 부근에 살았다. 그는 경화세족(京華世族) 출신으로 음악에 뛰어난 실력이 있어 스스로 곡을 만들기도 하였는데 현재 80수 정도가 전하고 있다. 그는 고관을 지내는 중에도 가객과 가

들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후원자였다. 이정보의 든든한 후원 아래 계섬은 나날이 실력이 늘어 온 나라에 알려지게 되었고, 계섬에게 노래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도 많아졌으며, 선비들도 노래와 시로써 계섬을 칭찬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계섬은 40이 넘은 나이에 평양감사 회갑연에 참석하여 대동강 선상(船上)에서

어난 노래 솜씨를 널리 알리기도 했다. 계섬은 홍국영(洪國榮, 1748~1781)의 노비로도 있었는데, 홍국영이 권력을 지나치게 휘두르자 정조가 물러가게 하며 노비를 하사했는데 계섬도 그중에 끼어 있었다. 홍국영이 부르자 할 수 없이 산중에서 나온 계섬은 고관들의 잔치에 나가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계섬은 홍국영과 더불어 잔치를 벌인 이들을 재주도 사랑할 줄 모르는 아첨꾼들로 홍국영의 일은 가소로운 일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이후 홍국영이 완전히 실각하자 계섬은

기생명부에서 빠져나와 자유의 몸이 되었다. 정조대 수원은 1789년 팔달산 아래로 수원부 읍치가 이전됨에 따라 화성행궁이 지어지고, 1793년 수원부가 ‘화성유수부’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1794년부터 본격적으로 화성 축성이 시작되어 1796년 공사가 마무리 되고 새로운 도시가 탄생되었다. 이 과정에서 계섬은 그녀의 명성을 토대로 노년에 화성유수부의 소속 기생이 되어 화성 기생들을 가르치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1795년 윤 2월 13일 정조 원행의 가장 중요한 행사였던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에서 다른 기생들을 이끌며

공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회갑 잔치는 진시 3각(오전 8시 45분경)부터 행궁의 정전 건물인 봉수당에서 거행되었다. 이 행사에는 혜경궁의 내외친척들이 초대되었고, 정조임금과 신하들은 차례로 혜경궁에게 술잔을 올리며 ‘천세’를 불러 축하했고, 그때마다 음악과 무용이 공연되었다. 또한 정조와

하들은 시를 써서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축원하였다. 당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의 기록에 보면, 서울과 화성유수부에서 선발된 여령(기생)들이 도기(都妓) 2명의 지휘를 받으며 춤과 음악을 선보였다. 도기 중 한명이 당시 60세였던 화성유수부 기생 계섬이었다. 처음 헌선도의 정재(궁중무용)가 추어지기 전 계섬의 노래 가락이 울려퍼지며 공연의 시작을 알렸다. 화성부에서는 계섬에게 가르침을 받은 노래 기생 모애(35세), 분단(29세), 윤애(27세), 동월(25세), 계월(25세), 매열(22세), 경희(17세), 금례(16세), 복혜(15세) 등 9명과 춤을 추는 기생으로 명금(32세), 연애(31세), 금련(25세), 옥혜(21세), 복취(21세) 등 5명이 진찬연에 참가하여 저마다의 아리따운 목소리와 모

새를 한껏 아름답게 펼쳐보이며 잔치를 흥겹게 하였다. 기생들의 노래소리와 각종 정재 헌선도(獻仙桃), 몽금척(夢金尺), 하왕은(荷皇恩), 포구락(抛毬樂), 무고(舞鼓)가 행해지며, 마지막에 모든 기생들이 동원되어 선유락(船遊樂)이 펼쳐지면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 공연은 마무리가 되었다. 여령들은 머리에 화관(花冠)을 쓰고, 노란 단삼(單衫)에 붉은 치마를 입고, 검은 바탕에 금실로 수를 놓은 띠를 매고, 오채 한삼(五彩汗衫)을 입고 예쁜 꽃이

람에 하늘거리듯 진찬연의 아름다움을 온 세상에 수놓았다. 이렇듯 화성의 아름다움을 더 한층 빛내었던 화성부 기생들의 스승과도 같았던 존재 계섬은 이후 경기도 파주의 시곡촌 산마을의 초야에 묻혀 살다가 1797년 여름 62세 되던 해 심로숭(沈魯崇, 1762~1837)을 만나 자신의 평생이야기를 털어놓게 되었는데 그것이 「桂蟾傳」으로 남

되었다. 그리고 계섬이 지엇다고 하
는 시조 한편이 전한다. 청춘은
언제 가며 백발은 언제 온고 오고 가는 길을 알았다면 막을 것을 알고도 못 막는 길이니 그를 슬퍼하노라
목록으로

고객만족도 조사 suwon museum opinion

☏ 031-228-4150

페이지 만족도 조사

평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