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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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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태
등록일 2010.07.28 필자 이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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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화성 건설과 관련하여 건설의 총책임자였던 채제공 선생이나 기본 설계를 한 정약용 선생의 그늘에 가려 빛을 못 보는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지금으로 말하면 수원 시장에 해당하는 화성부 유수 조심태(趙心泰, 영조16년:1740~정조23년:1799)이다.

무예가 뛰어난 그는 과거를 통하지 않고 조상의 덕으로 처음 벼슬길에 나갔으나 영조 44년(1768) 무과에 급제하였다. 정조가 즉위한 이후에는 그 총애가 각별하여 수원부사가 되기 전에 지낸 관직이 홍충도수군절도사, 홍충도병마절도사, 함경북도병마절도사, 삼도수군통제사, 좌포도대장, 총융사 등이었다. 이는 무관으로써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군사시설에 뛰어난 식견을 지녔고, 그 운영에 남다른 경험을 쌓았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징표이다.

그는 1789년 7월 정조의 고모부 박명원(朴明源, 1725~1790)의 상소로 사도세자의 원침 천봉이 결정되자 즉시 수원부사로 임명되었다. 이는 조심태의 실무능력을 특별히 인정한 정조의 뛰어난 인사 정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당시 정치권에서 소외되어 있던 소론(少論)계였는데 남인의 영수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천거로 중책을 맡게 된 것이

. 수원유수로 임명된 후 사도세자의 원침 이전과 구(舊)읍치를 새로운 터전인 팔달산 동쪽으로 옮기는 사업과 새로운 신도시를 키우고 번영시키는 일 등을 책임지고 훌륭하게 수행해 내었다. 잠시 훈련대장 ․ 포도대장 ․ 금위대장 ․ 어영대장 등을 역임한 후 1793년 화성 축성이 본격화되자 수원부사를 역임한 전력을 바탕으로 영중추부사 채제공과 함께 정조의 실무적인 정책조언자로서의 역할을 수

한다. 정조(1752~1800)는 축성을 하는데 드는 비용과 석재의 조달 등을 수원에 대해 훤히 알고 있는 조심태에게 문의하다가 1794년 2월에는 그를 아예 화성부 유수(華城府留守)로

명시켰다. 이후에도 정조는 성터잡기, 각 시설물 등의 성제, 고등동 앞에 펼쳐진 서유둔과 같은 둔전(屯田)의 경영, 장용영(壯勇營)의 설치 등 실무적인 모든 일을 조심태와 상의하고 결정하였다. 그는 1796년 9월에 화성 축성을 완결하고도 1797년 7월까지 임기를 넘기면서 화성부 유수로 재임하였다. 이어 한성부판윤(서울 시장), 형조판서, 장용대장 등을 역임하다가 1799년 9월 27일에 향년 60세로 사망하였다. 정조는 그의 공적을 기려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하고 무의(武毅)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한 회고하기를 “돌이켜보면 조심태는 화성을 건설하는 공역에서 처음부터 정성을 쏟아 지대한 공을 세웠고 …… 너무도 슬픈 나머지 나도 모르게 목이 메인다.”라며 그 슬픔을 이기지

했다고 한다. 세상에 태어나 한 두가지 일에 전념하고 일생을 마치는 일이 흔치 않다.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무관으로서의 최고 지위는 물론 화성 건설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는 자체가 대장부로 태어나 쉽게 얻을 수 없는 복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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