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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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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룡
등록일 2010.07.28 필자 이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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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속에서 외세와의 전쟁 중에서 가장 치욕스런 패배는 병자호란이 아닐까 생각된다. 병자호란은 1636년(인조 4) 12월부터 1637년 1월까지 만주에서 일어나 강대해진 청나라가 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다. 전쟁은 인조가 1637년 1월 30일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항복함으로써 치욕적인 패배로 끝났다. 하지만 병자호란에서 일방적인 패배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청나라를 맞아 대승을 거둔 전투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우리 수원에서 있었던 ‘광교산 전투’였다. ‘광교산 전투’는 김준룡(金俊龍, ?~1641)이라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장군이 이끌었다.

김준룡 장군은 병자호란 당시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재임하면서 관할 군사들을 이끌고 수원 광교산에 진을 쳤다. 광교산은 인조가 항전하고 있던 남한산성에서는 서남쪽의 요새로 배후에서 청나라 병사들을 압박하기에 좋은 지형과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때 남한산성이 오래도록 포위되어 안팎이 막히고 단절되었는데 남한산성을 지원하고자 전국 각지에서 지원 온 부대들은 대부분 패배하여 전세가 불리한 상황이었다
.
이러한 조건에서 그는 광교산 전투에서 청 태종의 사위인 ‘백양고라’와 장수 3명을 포함 하여 수많은 적병을 살해하고 대승리를 거두었다. 치열한 싸움으로 병사들이 흘린 피가 골짜기를 뒤덮었다고 전해져 지금도 광교산에는 오랑캐가 항복한 골짜기라는 뜻의 ‘호항골(胡降谷)’이라는 지명이 전해져 올 정도이다. 이러한 승전보는 1637년(인조 15) 1월 5일 실록자료에 나오는데 이는 당시 남한산성에서 항전하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위

이었다. 광교산 전투에서 김준룡 장군이 오랑캐를 물리친 공적을 기억하고 재평가 한 것은 바로 수원화성을 쌓은 조선조 22대 왕 정조 때의 일이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원침을 수원으로 옮기고 수원을 진흥시키고자 조세감면, 상업진흥, 조상 현양 사업 등 여러 가지 정책을 펴나갔다. 그 정책 중의 하나가 1792년(정조 16) 김준룡 장군에게 ‘충양(忠襄)’이라는 시호를 내린 일이었는데, 이는 “오랑캐를 섬멸하여 공을 세웠으니 마땅히 상을 주어야 한다”는 신기경(愼基慶, 1720~?)의 상소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수원 최초의 유수 채제공(蔡濟恭, 1720~1799) 선생은 수원화성을 축성할 때 광교산 호항골 깍아지른 바위에 그를 기리는 글을 새겨 길이길이 보전토록 하였다. 이는 수원이 경기도를 보장하는 주요한 군사적 중진이며 한강 남쪽의 요충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이었다. 상광교동 산 1-1 번지 비로봉 밑에 자리하고 있는 ‘金俊龍將軍戰勝地․碑(김준룡장군 전승지 및 비)’는 1977년 10월 경기도 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다. 아울러 수원역사박물관에 그 모형이 복제되어 전시되어

있기도 하다. 우리가 매주 오르내리는 수원의 진산인 광교산은 ‘보리밥’과 ‘먹을거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되새기는 의미 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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