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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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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등록일 2010.07.28 필자 김경표
시대구분 고려 원본 이고 원본파일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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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첨부이미지

정조는 고려 말 조선초의 충효(忠孝)의 대표 인물인 이고(李皐, 1341년~1420년)를 팔달산의 주인이라 하며 처사(處士:벼슬에 나서지 않은 학자)로서 높이 사 그의 묘소에 제문을 짓고 치하했다.

수원화성 건설 과정에서 팔달산 아래 자리잡고 있었던 이고의 후손들 묘역에 향교가 들어서면서 그들의 선친 다섯 자리의 무덤을 옮기게 됐다. 정조는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됐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제문을 통해 조선건국 후에도 고려의 충신으로 남은 이고의 강직한 성품을 고사(故事)를 인용해 높게 평가하고, 팔달산의 이름이 그에 의해서 유래됐음을 들어 그를 팔달산의 주인이라고 제문을 지었다.

이와 같은 이고의 행적은 이긍익(李肯翊)이 조선왕조 야사를 정리한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잘 나타나 있다. 이고의 본관은 여흥(驪興:지금의 여주)이다. 공민왕 갑인(甲寅, 1374)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이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집현전 직제학으로 고려 말엽에 이르러 관직에서 물러나 수원의 광교남탑산(光敎南塔山)에서 살았다. 스스로 망천(忘川)이라 호를 지었으니, 세념(世念)을 잊는다는 뜻이었다. 공양왕이 신하를 보내 즐거움이 무엇인가 물으니 이고는 산천의 승경(勝景)을 극구 칭찬했는데, 그 말 가운데는 사통팔달(四通八達)해 막힌 데가 없다는 말이 있었

. 조선이 건국되고 태조가 즉위해 이고에게 여러 번 관직에 나설 것을 전했으나 나서지 않았다. 태조가 화공(畵工)에게 명해 이고가 거처한 곳을 그리게 해 이것을 보고 이름 지어 팔달산(八達山)이라 했다. 세종대에 비석을 특별히 그 마을 입구에 세워 ‘고려 효자 한림학사 이고의 비’라고 했다. 대개 조선에 벼슬하지 아니한 여덟 사람의 학사를 세상에서 팔학사(八學士)라고 칭하는데, 이고는 조견(趙狷)·이집(李集)과 함께 삼학사로 서로 살던 곳이 가까워 만나곤 했다

한다. 그런데 1733년(영조 9)에 다시 세워진 이고의 비문과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와는 조금 다른 내용

전해진다. 이고의 비문에 쓰여진 고려시대 행적은 '연려실기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고려 효자'라는 비명을 짓게 된 일화를 비문을 통해

볼 수 있다. 이고는 벼슬을 휴직하고 수원으로 돌아와 정성을 다해 부모를 봉양하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여막을 지키고 살았다고 한다. 이때 아침저녁으로 제를 올리며 효성으로 애통하는 마음이 지극해 피눈물이 그치지 아니하니 마침내 한 눈을 실명하게 됐다. 이 사실을 듣고 조정에서 정려를 세우고, 향당에서는 공의 효성을

송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후반부 비문에 실린 조선시대의 행적은 '연려실기술'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고가 태조 원년에 삼사좌승이 되고 경기도안렴사를 겸했다는

용이 바로 그것이다. 이고의 조선시대의 행적은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1392년(태조 원년) 우도(右道)의 삼사좌승 이고에게 교서를 내렸다는 기록과 1395년(태조 4) 3월부터 7월까지 몇 차례에 걸쳐 간관으로서 태조에게 몇 차례 상소를 올린 내용과 이후 곧바로 파
직됐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또한 1407년(태종 7)에는 초야에 묻혀있는 이고를 등용해야 한다는 내용과 1409년(태종 9) 7월에 그를 등용했으나 9월에 사퇴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 권숙을 공안부윤으로, 이고를 이조 참의로 삼은 것인데, 며칠 뒤 이고를 다시 공안부윤으로 임명했지만

9월에 사직했다는 것이다. 권숙과 이고는 모두 초야에 묻혀 있던 선비를 등용하려 한 것이었지만 이들은 이를 거부하고 관직에 나서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1420년(세종 2) 이고가 8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는 기사가 나타난다. 그가 고려 말에 과거에 급제해 대간(臺諫)을 역임했고, 여러 관직을 거쳐 공안부윤·집현전 학사에 이르렀고, 수원에 노퇴했

가 이해에 별세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고의 조선시대 행적에 대한 조선후기 기록과 조선건국초의 상반된 기사들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이고의 조선시대 행적에 대해 관직에 나갔다는 설과 수원에 은거하며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는 설이 주장되고 있다. 전자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통해 조선건국초 관직에 나갔으나, 그의 강직한 성품에 따라 자신의 주장을 펴다가 파직돼 이후 수원에 은거했다는 것이다. 후자는 조선건국초 실록의 기록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세종대 정려석비를 내리면서 ‘고려효자 한림학사’라고 고려왕조의 관직을 쓴 점, '연려실기술'의 내용과 정조의 치제문 및 후대 기록에 나타나는 내용 등을 들어 그가 관직에 나가지 않

수원에 은거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고려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킨 이고를 부각시키기 위해 조선초기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부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조선초기 실록이 건국의 정당화를 위해 후대에 몇 차례에 걸쳐 고쳐졌음을 근거로 당대에 쓰여진 이고의 행적에 의문을 제

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고가 조선시대 관직에 나아갔는가에 대한 사실 문제는 그리 중요치 않게 생각된다. 그가 관직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수원 팔달산 아래 기거하면서 애향심과 주민에 대한 애정과 정성을 쏟

며 살았음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현재 수원의 권선(勸善)이라는 지명은 이고가 이곳에 머물면서 주민들에게 선을 권해 주민들을 가르치는 데 열중, 그 뜻을 이어받아 권선리로 명칭을 바꾸게 됐다고 전해진다. 이와 같은 이고의 효와 선비정신, 애향심은 후손에 의해 이어져 내려오다가 정조시대에 이르러 널리 알려지게 됐다. 아마도 이고의 삶이 정조가 꿈꾸던 화성건설의 배경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정조는 팔달산의 유래와 이를 칭송하면서 화성을 건설할 때 남문을 팔달문이라고 했고, 이고

집터에 학사대(學士臺)를 세워 표시하게 했다. 현재 이고의 묘역은 수원시 향토유적 제22호로 지정돼 있으며, 장안구 하광교동 산 51-1번지에 위치해 있다. 여름에는 묘역 입구에 연꽃이 피어 그 아름다움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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