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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각국사 천희
등록일 2010.07.28 필자 김수현
시대구분 고려 원본 진각국사 천희 원본파일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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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각국사 천희 첨부이미지

수원 화성의 뛰어난 건축물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건물, 방화수류정.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자 찾아오지만, 정작 그곳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는 곳에 수원의 불교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보물이 숨쉬고 있는지 잘 모른다. 바로 보물 제14호인 창성사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彰聖寺 眞覺國師 大覺圓照塔碑)가 그것이다.

보호각과 굳게 닫혀 있는 자물쇠 때문에 일반인들은 무심코 그 옆을 지나치지만, 수원이 소유한 6점의 보물 중 가장 오래되었고 유일한 고려시대의 유물이 바로 이 탑비라는 사실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
?
‘진각국사’라는 시호를 쓴 고려시대의 고승은 전부 셋이 있는데, 이 탑비의 주인공은 바로 천희(千熙)이

. 탑비의 기록을 통해 천희는 1307년(충렬왕 33) 5월 21일에 태어나 1382년(우왕 8) 6월 16일 창성사(彰聖寺)에서 입적했음을 알 수

있다. 창성사는 바로 수원의 진산인 광교산에 자리 잡았던 사찰로서 현재는 그 터만 남아있지만 조선후기까지 그 명맥이 유지되어왔던

사찰이다. 천희의 호는 설산(雪山), 출신은 흥해(興海:포항 흥해읍) 지역이다. 13살인 1319년(충숙왕 6)에 출가하여 화엄종 반룡사 일비(一非)스님에게 귀의하여 머리를 깎았다. 1325년(공민왕 12)에 승과에 합격한 이후 금생사(金生寺), 덕천사(德泉寺), 부인사(符印寺), 개태사(開泰寺) 등 10군데에서 주지를 맡아 수행하였고 오대산 및 금강산에서 수행하다가 중국 유학을 결심, 1364년(공민왕 13)부터 2년간 원나라에서 선종의 요지를 배

고 돌아왔다. 천희는 화엄종 승려였지만 중국 임제종의 맥을 잇는 만봉시울(萬峰時蔚)과 선(禪)을 나누고 왔는데, 이는 당시 교선일치(敎禪一致)의 분위기 속에서 화엄종풍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자 한 천희의 의지라 보인다. 귀국 후 천희는 중앙 불교계에서 두각을 드러내었는데, 공민왕의 존숭과 사람들의 대환영 덕분에 국사(國師)로 책봉 받게 되었다. 일반 선사들과는 다르게 공민왕이 직접 천희를 찾아가 제의하였다고 하니 그에 대한 공민왕의 신망을

작해 볼 수 있다. 국사가 된 이후 천희는 1370년(공민왕 19) 당시 왕사(王師)였던 나옹(懶翁, 1320~1376)과 함께 선교(禪敎)의 공부가 뛰어난 승려를 뽑는 증명법사(證明法師)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당대 권승이었던 신돈(辛旽, ?~1371)과의 깊은 친분은 그의 활동범위를 짐작해 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신돈이 실각한 이후로는 지방을 유력하다가 부석사(浮石寺)에 주석하면서 화엄종풍을 이끌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372년(공민왕 21) 부석사 주지로 있으면서 1376년부터 1여년 동안 무량수전과 조사전 등 전

을 크게 중창하였다. 부석사는 절을 창건한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진영(眞影)이 모셔져 있는 화엄종계의 구심점 사찰이었던 만큼, 화엄종승이었던 천희는 이 곳에서 화엄의 교세를 다시 일으키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천희가 부석국사(浮石國師)로 불리게 된 것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천희는 치악산, 금강산, 오대산 등지에서 후학을 지도하다가 1382년(우왕 8) 6월 16일에 수원의 창성사에서 입적(入寂)하였다.

국사의 나이 76세였다. 창성사는 광교산 89개의 부속암자를 지닌 대사찰이었고, 조선 태종 6년 불교교단 대탄압시 국가공인 사찰로서 지정될 만큼 수원을 대표하는 대사찰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불교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던 수원 무봉산의 만의사와 과천의 청계사와 더불어 창성사 역시 근기(近畿) 지

의 중요 사찰이었던 것이다. 1386년(우왕 12) 국사가 입적한 4년 후 창성사에 천희의 탑비가 세워졌다. 우왕은 시호를 진각국사(眞覺國師)라 하고 탑호(塔號)를 대각원조탑(大覺圓照塔)이라 내린 후, 당대 뛰어난 학자였던 이색(李穡, 1328~1396)으로 하여금 비문을 짓도록 명하였다. 조선시대 창성사에 관한 기록은 소략하여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1799년의 기록을 통해 조선후기까지 창성사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시기 절은 폐사가 되었고, 탑비 또한 방치되자 1965년 6월 9일 현위

인 매향동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고려후기 마지막 화엄종 국사였던 천희는 우리에게 고려불교의 한 맥락을 수원에서 찾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 방화수류정을 거닐다, 혹은 주말에 광교산을 등산하다 잠시 고려시대의 고승 천희의 존재를 떠올려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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