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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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0.07.27 | 필자 | 한동민 | ||
시대구분 | 근대 | 원본 | |||
내용 |
수원면 산루리(현 팔달로) 출신으로 휘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9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상해(上海)로 가려다가 삼일학교(三一學校) 교사 이종상(李鍾祥)을 만나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펴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1920년 7월까지 수원 일대에서 ≪애국창가집≫과 〈대한민보(大韓民報)〉 수십매를 배포하며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 이들은 이후 보다 조직적인 활동을 펴기 위해 1920년 6월 20일 임순남(林順男)·최문순(崔文順)·이선경(李善卿) 등의 여학생을 규합하여 비밀결사 구국민단(救國民團)을 조직하였는데 그는 단장에 선임되어 동단의 활동을 주도하 였 다. 동단은 독립국가를 실현할 것과 독립지사들의 가족을 후원할 것을 활동목표로 삼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임시정부의 문서를 국내에 배포하는 등 임시정부 지원활동도 폈다. 특히 동단의 여학생들은 임시정부 적십자회(赤十字會)에 참가하여 미·일전쟁이 일어나면 간호부로서 참전할 것을 계 획 하였다. 동단은 이후 혈복단(血復團)으로 명칭을 바꾸고 매주 금요일 삼일학교에서 회합하여 독립운동 방침을 협의하였으며 김석호(金錫浩)·김노적(金露積)·김귀섭(金龜燮)·김병갑(金秉甲)·이희경(李熙景)·신용준(愼用俊) 등을 동지로 포섭하기 위해 활동하던 중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1921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 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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