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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수원의 문화공간
게시물 상세보기
팔달문 앞
등록일
2010.07.30
작성자
수원박물관
조회수
5322
첨부파일
팔달문.jpg(30kb)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팔달문" src="/upload_file/fckeditor/image/3.jpg" /></p> <p><br /> ● 전봇대와 전깃줄이 걸리다<br /> <br /> 화성 건설 이후 가장 변화가 다양하고 풍부한 곳이 팔달문 주변이었다. 팔달문 옆 남암문 안팎에 형성된 수원장(水原場)은 사방 100여리 경기남부 지역의 상권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팔달산 서쪽의 수원역을 중심으로 일본인 상권이 형성되면서 전통적인 남문 상권과 각축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제 점차 일본인 자본은 수원역에서 팔달문의 조선인 중심상권으로 지속적으로 밀려들어왔다. 그러한 변화의 모습은 팔달문 주변 상가의 변천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p> <p>근대에 들어오면서 팔달문 앞 상가의 변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우체통과 전봇대의 등장이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전등이 켜진 곳은 경복궁 내 건청궁이었다. 1887년 3월에 향원정 연못가에 세운 발전 장비 덕이었다. 이는 16촉광 백열등 750개를 켤 수 있는 시설규모였고, 이후 1894년 5월부터는 창덕궁에도 전기가 공급되었다. 근대적 문물 도입에 적극적이었던 고종황제는 서울지역에 전차·전등·전화 사업을 위해 1898년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하기도 하였다.</p> <p>이미 약삭빠른 일본인들은 1901년부터 인천·부산·원산 등 개항장을 중심으로 소규모의 배전사업에 착수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전등은 지방의 각 소읍까지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수원의 경우 수원전기(水原電氣) 주식회사가 1913년 7월 6일 수원군 수원면 산루리 253번지에 설립되었다. 전등·전력 공급 및 전기 기구 판매를 위해 설립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사업의 수원전기주식회사는 수원의 지역유지들과 일본인들의 합작품이었다.</p> <p>즉 홍건섭(洪健燮)·양성관(梁聖寬)·한상봉(韓相鳳) 등의 조선인과 곤도오(近藤虎之助)·카야마(香山弘)·사카데(坂手重三郞)·노나카(野中末吉)·사카이(酒井政之助) 등 8명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전무이사는 일본인 곤도오였다. 그러나 수원지역의 한국인과 일본인 유지들에 의해 운영되던 수원전기주식회사는 1928년 10월 2일 경성전기(京城電氣)에 매각되어 경성전기 수원지점이 되었다.</p> <p>따라서 수원지역의 전봇대의 설치와 전깃줄의 존재는 1913년 이후의 일이 되는 셈이다. 물론 전봇대 이전에도 전신주는 존재하였다. 우체국이 설치되면서 전신전화의 활용이 먼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p> <p>또 다른 지표 가운데 하나가 일제시기 우체통의 변화로 파악할 수 있다. 그 기준점이 되는 것이 1912년식 우체통의 등장이다. 그 이전 사각 나무통 같은 형태의 우체통에서 철제의 원통형의 우체통으로 변화되었는데, 이러한 1912년식 우체통은 해방이 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조선을 비롯하여 일본의 영향력이 미쳤던 대만 등지에서도 사용되었다.</p> <p>● 팔달문 앞 상가의 변화<br /> <br /> 수원의 근대적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팔달문 주변의 상가의 변화라 할 수 있다. 화성 건설 이후 화성의 남문으로 당당하게 서 있는 팔달문 앞으로 넓은 대로를 따라 가게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 가게들은 초가로 된 지극히 단순한 형태의 가가(假家)로 시작되었지만 점차 규모와 형태가 온전한 것으로 변화되어 갔다.</p> <p>가장 오래된 팔달산 사진으로는 프랑스 파리에서 제작된 사진이 남아 있다. ‘서울-제물포에서 서울 가는 길’ 이라는 프랑스어로 된 사진 설명은 수원 팔달문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서울의 성곽의 일부로 잘못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02년 이전 사진으로 추정된다. 이는 팔달문 양 옆의 가게의 형태와 규모가 작고 단순한 반면 상대적으로 팔달문 앞길이 넓은데, 이후의 사진들과 다른 점이다. 이는 조선시대적인 특징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여전히 주요한 운반수단으로 노새가 등장하고 있는데, 노새를 타고 가는 주인은 일산을 받치고 있고 하인이 노새를 다루고 있다. 성밖으로 나오는 할아버지는 손녀로 보이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나오는데,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서구문물이 거침없이 들어오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p> <p>이러한 서양문물의 유입은 점차 일본색이 강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05년 소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고 보호국으로 전락한 상황은 팔달문 밖의 상점들마다 모두 일장기가 걸려 있는 날도 생겼다. 그러나 1910년 전후 상점의 주인이 일본인으로 바뀌는 상황이 빠르게 진행되었지만, 여전히 팔달문 양쪽으로 초가집으로 된 상가들과 한복을 입은 조선인 남자들이 주요한 고객이었다. 지나는 행인들은 남자들로 상투와 한복차림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한쪽으로 어린이들은 그들의 당연한 땅에서 놀이를 하고 있다. 그러나 점차 일본색의 강화는 성밖의 초가집 상점과 반대편 양철로 된 일본식 상점들이 점점 늘어나고 인단(仁丹)·청량환(淸凉丸) 등의 상표가 붙은 간판들도 늘어갔다.</p> <p>● 옹성의 철거, 그리고 도로의 확장<br /> <br /> 팔달문의 변화 가운데 가장 큰 변화의 기준점은 팔달문 옹성문과 옹벽의 존재 여부이다. 교통의 편리함을 이유로 옹성문이 철거되는 것은 1913년의 일이다. 그리고 그 옹성벽이 더욱 넓게 훼철되는 것은 1929년 3월의 일이다.</p> <p>1929년 3월 25일부터 수원역~남문~북문 구간 자갈을 민간인들의 부역을 통하여 실시되었다. 이러한 도로확장 차원에서 옹성문이 철거된 셈이다. 또한 이때 북수리(차태익 집 앞)~ 화홍문 구간의 도로도 확장되었다. 교통왕래의 원활함을 위한 것이었지만 팔달문의 변화는 옹성의 훼철 여부로 그 시대적 변화를 파악할 수 있다.</p> <p>이렇게 훼손된 팔달문의 깊은 시름만큼 팔달문 앞의 상가와 상권은 일본인들에게 잠식되어 갔다. 1912년 보이던 인단(仁丹)가게는 길 건너편으로 이전하였고, 다시 약방 등으로 변화되었다. 가장 번화한 그곳인 만큼 변화의 폭도 가장 극심했던 셈이다. 은성했던 그곳 남문 상가 옆으로 인력거들이 몇 대 씩 서 있으면서 탈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p> <p>그리고 팔달문 적대에서 남수문으로 이어지는 성벽이 훼철되면서 남암문을 중심으로 한 남문 상권이 더욱 강고하게 자리매김하며 남문 영동 시장의 상권을 강화했다. 1930년대 이후 남문의 상권은 수원역의 상권과 상승작용하면서 경기남부 상권을 확고하게 장악해 가고 있었다.</p> <p>특히 1931년 수원면이 수원읍으로 되면서 동네 이름이 일본식 지명으로 변화되었다. 팔달문 일대는 본정(本町)으로 바뀌면서 일본인들은 ‘본정통’으로 불렀지만 한국인들에겐 끝까지 ‘남문통’으로 부르는 수원 상권의 자부심이었다.</p> <p>1940년대 초 ‘수원읍 본정 2정목 18번지’에서 태어난 일본인은 지금의 그곳의 위치를 알고자 했다. 원래 수원면 산루리(山樓里) 18번지였던 그곳은 1931년 일본식 지명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해방 후 수원시 팔달로3가 18번지로 변경되었고, 1964년 팔달로 확장에 따라 도로로 편입되면서 지번이 말소되었다. 지금 그곳은 팔달로3가 26-11번지, 우리은행 건물 앞 대로가 되었다.</p> <p>● 팔달문이 보물인 까닭<br /> <br /> 해방 후 팔달문은 1950년 6·25전쟁 와중에도 의연하게 살아남았다. 한국전쟁의 아픔은 인명의 피해뿐만 아니라 화성 같은 문화유산의 훼손에도 있었다. 1950년 9월 26일 오전 11시 북문이 미군에 의해 폭격을 받아 부서졌다. 수원사람들은 그래서 놀라운 어휘력을 구사하여 ‘남문은 남아있고, 서문은 서있고, 북문은 부서지고, 동문은 도망갔네’ 라는 말로써 그 아픔을 형용하였다. 그렇게 남아 있고, 서 있는 팔달문과 화서문은 그래서 보물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p> <p>전쟁으로 인한 문화유산 자체의 파괴도 그러하지만 주변 경관의 파괴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방화수류정 앞 육지송은 화성을 대표하는 명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1·4후퇴 당시 주변에 몰려든 피난민들에 의해 땔감으로 베어져 사라져갔다.</p> <p>허물어진 성벽은 지난 시절의 우리시대의 문화와 경제적 수준을 보여주는 자화상이었다. 이후 경제발전과 함께 화성은 국방유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1975~1979년까지 복원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화성은 지금도 온전한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br /> <br /> 작성자 : 수원박물관 한예연구사 한동민</p>
☏ 031-228-4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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