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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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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향화
등록일 2010.07.28 필자 이동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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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김향화 첨부이미지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의 절정이었던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고종의 돌아가심을 누구보다도 슬퍼하며 곡을 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친 수원기생 30여명이 있다. 이 수원기생들을 이끌었던 인물이 수원기생의 꽃 ‘의기(義妓) 김향화(金香花, 金杏花)’이다.

김향화는 1896년 7월 16일 생으로 본명이 순이(順伊) 였다. 향화는 기명으로 꽃과 같이 아름다운 그녀의 명성에 걸 맞는 이름이었다. 원래 서울에서 태어나고 어느때부터인지 수원에 내려와 기생으로 이름을 떨쳤다. 김향화는 당시 1918년 발행된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이라는 홍보 책자에 수원예기조합 기생 32명과 함께 다음과 같이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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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杏花(2
2세) 百計留春하되 春不留人하고 萬金惜花하되 花不惜人하야 把我綠鬟紅袖하야 一直蹉跎了兩十光陰이로다. 誰道歌曲이 能解愁오 歌曲是一生的業冤

로다. 온갖 계책으로 봄을 머무르게 하되 봄은 사람을 머무르게 하지 못하고 만금은 꽃을 애석해 하지만 꽃은 사람을 애석해 하지 않아, 나의 푸른 쪽진 머리, 주홍 소매를 쥐고서 한번 넘어지면 이십 광음이 끝나도다. 누가 가곡이 근심을 능히 풀 수 있다 말하는가. 가곡은 일생의 업원(전생에서 지은죄로 이승에서 받는 괴로

)이로다. 본디 경성 성장으로, 화류간의 꽃이 되어, 삼오 청춘 지냈구나, 가자가자 구경 가자, 수원산천 구경 가자, 수원이라 하는 곳도, 풍류기관 설립하여, 개성조합 이름 쫒네, 일로부터 김행화도, 그 곳 꽃이 되었세라, 검무, 승무, 정재춤과, 가사, 시조, 경성잡가, 서관소리, 양금치기, 막힐 것이 바이없고, 갸름한 듯 그 얼굴에, 죽은깨가 운치 있고, 탁성인 듯 그 목청은, 애원성이 구슬프며, 맵시동동 중등 키요, 성질

화 귀엽더라. 김향화는 경성에서 나고 자라서 수원기생이 된 후 수원기생조합의 꽃이 되었다. 갸름한 얼굴에 주근깨가 있으나, 목청은 탁 트여서 애절하면서도 구슬프게 노래를 잘하며 순하고 귀여운 기생이었다. 그러나 『조선미인보감』에 실린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왠지 모를

굳셈이 느껴진다. 수원에서는 예부터 기생들의 풍류와 예악이 울려퍼지던 곳이었다. 조선 정조대에 채제공이 화성(華城)을 축성하면서 제일가는 풍경으로 일컬어지는 방화수류정에 올라 용두암 아래 연못 용연(龍淵)에 배를 띠우고, 기생이 춤을 추며 흥을 돋았다. 또한 화성행궁의 정궁인 봉수당에서 열린 진찬연을 아름답게 빛냈던 것은 기생들의 가무와 고운 자태였다. 전통 사회의 풍류와 예악에서는 기생이 꽃과 같이 아름다워 빼놓

수 없는 존재였다. 이러한 전통적인 기생들의 삶의 변화는 조선 사회의 붕괴와 함께 직제상 1907년 관기제도가 폐지되었다. 이후 1908년 9월 일제에 의해 ‘기생 및 창기 단속령’이 제정되면서 기생들의 삶은 공창제의 확산과 함께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였다. 일제는 경시청에 의해 모든 기생들이 기생조합에 가입하여 영업 허가를 받아야만 활동할 수 있게 하였다. 이때부터 기생들은 식민지배의 통제아래에서 감독과 관리를 받으며 상업적 기생

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식민지 통제 속에 수원기생조합이 만들어졌는데 1910년대 초반으로 보이며 공식명칭은 ‘수원예기조합(水原藝妓組合)’이었다. 수원예기조합은 수원면 남수리에 있었는데 지금의 화홍문 아래 수원천을

따라 있는 남향동 일대이다. 수원 기생들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강압적 식민 통치와 경제적 예속관계에 강력한 저항으로 맞섰던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김향화를 중심으로 일제의 총칼을 두려워하지 않고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수원 기생들의 만세운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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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9년 3월 29일 일어났다. 당시 화성행궁 봉수당을 사용했던 자혜의원으로 건강검진을 갔던 김향화와 30여명의 기생들은 자혜의원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자혜의원 앞에는 수원경찰서가 있어 일본 경찰과 수비대가 총칼을 차고 근무하고 있었으나, 김향화와 수원기생들은 일제의 총칼에 굴하지 않고 만세를 부르는 기개를 보여주었다. 당시 꽃다운 나이 스물셋의 기생 김향화는 기생들의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이들을 이끌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후 2개월여의 감금과 고문 끝에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 검사분국으로 넘겨져 재판을 받고 징역 6개월에 처해져 옥고를 치렀다. 재판 과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방청객으로 참

하여 김향화의 의로움을 지켜보았다. 김향화와 수원기생들의 3․1운동은 관기의 후예와 전통예능의 전수자로서 보여준 민족적 항쟁이었으며, 일제의 강압적인 기생제도와 식민통제에 대한 생존의 몸부림이었다. 오늘날 기생의 존재는 옛날이야기로 묻혀버렸다. 하지만 기생도 우리 민족의 일원이었으며, 이 여성들의 재능은 대중예술이라는 장르로 계승되었고, 당시 식민지 권력에 대항하며 보여주었던 수원기생들의 민족적 의로움은 오늘의 교훈으로 이어지고 있다. 김향화는 지난해 4월 국가보훈처로부터 대통령표창을 받고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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