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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18세기에는 서예사에 있어 특유의 개성으로 서예사를 빛낸 이들이 여럿 출현한다. 특히 17세기 이후 청나라로부터 전래된 금석학(金石學)과 한대(漢代) 비문(碑文)이 유입된 것은 당시 서예가들에게 예서(隸書) 학습을 심화시킨 계기가 됐으며 이로 인해 많은 명서가들이 탄생되는 귀추가 됐을 것이다. 이들 중에 한대(漢代)의 예서 뿐 아니라 당대(唐代) 예서에 이르는 다양한 학습을 시도한 이가 있었으니 기원 유한지(綺園 兪漢芝:1760~1834)가 단연 우뚝하다.
유한지의 자는 덕휘(德輝), 호는 기원(綺園)이다. 16~17세기 서인의 명문가로 부상한 기계유씨 자산공파(慈山公波)의 후손이다. 기계유문은 영·정조대의 정치를 이끌고 명문가와의 혼인관계로 정치적 유대를 다져 노론의 핵심가문으로 최고의 성세를 이뤘던 가문이었다.
서인의 핵심인물로 활약하며 사림간의 폭넓은 교유관계를 가졌던 유황(兪榥:1599~1655), 유철(1606~1671)을 비롯해 유황의 아들로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한 유명기(兪命夔:1622~1724), 유명뢰(兪命賚1652~1712),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1548~1631)의 문인인 유계(兪棨:1607~1664)와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1653~1722)의 문인 유숙기(兪肅基:1691~1752) 같은 저명한 주자학자가 배출되기도 했 다 .
또 예서에 두각을 드러내었던 곡운 김수증(谷雲 金壽增:1624~1701)의 사위이자 제자인 유명건(兪命健:1664~1724)으로 인해 안동김씨 가문과의 관계를 다지기도 한 가문이다. 유한지는 유명뢰의 증손자이자 당대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저암 유한준(著庵 兪漢雋:1732~1811)의 종제로서 이러한 가풍에 연원해 전서(篆書)와 예서 학습에 심혈을 기울였던 인 물 이다.
유한지의 예서 작품은 묵서를 비롯해 금석문, 편액서(扁額書)로 다양하게 전하고 있다. 그 중 정조 재위시절 화성과 관련한 그의 필적이 주목된다. 금석문으로 전하는 그의 작품 중 <만안교비(萬安橋碑)>는 정조의 화성 행차 시 세운 만안교(萬安橋) 옆에 공사개요를 기록 한 비이다.
비석 전면에 대자(大字)로 ‘만안교’라고 쓴 글씨는 둔중한 필획과 장방형의 짜임을 드러내 육중한 당대 예서의 전형을 표현하고 있다. 음기에는 당대 각체를 두루 구사했던 조윤형(曺允亨:1725~1799)의 글씨가 있는데 당시 정조의 시책과 관련해 글씨로 인정받았던 조윤형과 함께 필적을 남겼다는 사실은 그의 명성을 짐작할 수 있 는 부분이다.
이 뿐 아니라 유한지는 화성의 <화홍문(華虹門)> 현판을 쓰게 된다. 글씨는 획의 끝을 위로 뽑아 올려 힘찬 기세와 웅장함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러한 필력이 정조로부터 글씨로 신임을 얻을 수 있었던 뒷받 침 이 됐을 것이다.
유한지는 한대 예서를 수용함에 있어서 다양한 비문을 학습했던 서예가였다. <예기비(禮器碑)>, <조전비(曹全碑)>, <사신비(史晨碑)> 등의 서풍을 학습했는데 《기원첩(綺園帖)》에서는 <예기비>, <조전비>, <하승비(夏承碑)>와 <장천비(張遷碑)>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서풍을 한 작품안에 표현해 그 특 색을 드러내기도 했다.
전서에 있어서도 이인상(李麟祥:1710~1760), 이한진(李漢鎭:1732~1815)과 유사한 서풍을 따르면서도 또다른 면모를 보이기도 하는데 예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폭넓은 이해가 바탕 이 됐을 것이라 짐작한다.
이외에도 유한지의 작품 중에는 화가들의 작품에 화제나 제서를 쓴 것들이 여럿 전한다. 1804년 김홍도의 작품 <기로세련계도(耆老世聯稧圖)>의 제서, 1796년 작품인 《단원화첩(檀園畵帖)》의 표제인 ‘단원절세보(檀園折世寶)’를 쓰고, 이인문의 작품 <산정일장병(山靜日長屛)>, <강정휴경도(江亭休景圖)>, <산촌우여 ( 山村雨餘)>의 화제를 썼다.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의하면 유한지는 전서와 예서에 있어 모두 능한 서예가로 기록돼 있다. 또 예서와 전서에 능헤 신위(申緯:1769~1845), 김정희(金正喜:1786~1856) 등에 의해 높게 평가되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김정희로부터 이인상의 글씨에 비해 서권기 가 부족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그의 명성을 거론하기에 앞서 주목할 점은 그에게 있어 금석학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예서에 있어서 폭넓은 인식을 갖고 나아가 그것을 자신의 글씨에 폭넓게 구사하고 있다는데 있는 것이다. 때문에 유한지는 예서를 집대성하여 실천한 인물이자 예서부분에서 당대의 정점에 이르른 인물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