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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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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백
등록일 2010.07.28 필자 김경표
시대구분 고려 원본 최루백 원본파일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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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백(崔婁伯)은 수원의 아전 최상저(崔尙翥)의 아들이다. 최상저는 수원을 본관으로 하는 수원최씨의 시조이다. 최루백은 고려 때부터 효자로 널리 알려져 '고려사' 열전 효우편과 조선시대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등에 그 일화가 남겨져 있다. 그의 효자각은 현재 봉담읍 분천리 165-1번지에 위치하며, 화성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돼 있다. 효자 최루백의 일화는 다음과 같다.

그의 나이 15세 때에 아버지가 사냥을 갔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 이에 최루백은 어머니의 만류에도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도끼를 들고 나섰다. 그는 호랑이의 발자국을 쫓아가 배불리 먹고 누워있는 호랑이를 도끼로 내리치고 배를 갈라, 부친의 뼈와 살점을 골라 그릇에 넣어 홍법산 서쪽에 매장했다. 그리고 그 곁에 움막을 세워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어느 날 최루백이 졸고 있는데 아버지인 상저가 나타나 아들의 효심을 칭찬하는 시를 읊고 사라지니, 최루백은 상을 마치고 호랑이 고기를 꺼내 먹었다.

후에 최루백은 과거에 급제해 1153년(의종 7) 사신으로 금나라에 용흥절(龍興節)을 축하하기 위해 다녀왔으며, 1154년(의종 12)에 치러진 승보시(升補試: 생원을 뽑는 시험)를 국자제주 염직량과 함께 주관하는 등 여러 관직을 거쳐 기거사인(起居舍人) 국자사업(國子司業) 한림학사(翰林學士) 벼슬을

다. 우리에게 효자로 널리 알려진 최루백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이 대목에서 끝을 맺고는 한다. 그렇다면 ‘효자 최루백’이 아닌 ‘인물 최루백’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최루백과 그의 아내 염경애 묘지명의 삶을 통해 ‘인물 최루백’에게 한걸음 더 다가

보자. “간관(諫官)은 녹이나 지키는 자리

아니오.” 최루백은 효자이면서도 검소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의 묘지명에는 ‘그가 사람됨이 너그럽고 공손하며 검소하였다’고 적고 있다. 아내 염경애의 묘지명에는 최루백의 검소하고 강직한 모습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가난한 삶을 살아온 최루백이 지제고(知制誥:고려시대 관직으로 조서(詔書)·교서(敎書) 등을 작성하는 일을 맡는다)에 임명되니, 아내인 염경애는 “우리의 가난이 가시려나 봅니다”라고 기쁜 빛을

띠며 말했다. 이에 최루백은 “간관은 녹이나 지키는 자리가 아니오”라고 하자, 아내가 다시 “문득 어느날 그대가 궁전의 섬돌에 서서 천자(天子)와 더불어 옳고 그른 것을 논쟁하게 된다며, 비록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무명치마를 입고 삼태기를 이고 살아가게 되더라도 또한 달게 여길 것입니다”라고 했다. 최루백의 검소하고 강직한 삶과 함께 이를 지키도록 한 아내 염경애의 내조가 엿 보이는 일화

아닌가 생각된다. 최루백은 자신의 처인 염경애가 1146년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 아쉬움에 자신이 직접 묘지명을 짓는다. 보통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했는데, 최루백이 그렇게 했다면 우리는 고려시대 여성 ‘염경애’라는 이름 대신 ‘봉성현군 염씨’, ‘최루백의 처’로만 기억될 일이었다. 최루백의 아내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음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실이라 할 수 있다. 묘지석의 내용은 최루백 자신과 가난을 함께하며 아무런 말없이 옆을 지켜준 아내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함께한 23년 세월 동안 모시지 못한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해마다 제사를 지낸 아내의 효심과 자신에게 올바른 내조를 해준 일들을 고마워하는 내용, 아내가 죽은 후 집안의 형편은 더 나아졌지만, 아내가 있을 때만 못하다는 아쉬움과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담긴 글로 가득하다. 최루백이 아내 염경애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담아 써내려갔음이 글

자연스레 스며들어 있다. 최루백이 태어난 해에 대해 정확한 자료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이를 추적할 수 있는 몇 가지 자료를 통해 나이를 추측해보면 최루백은 100세가 넘게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최루백의 묘지명은 ‘歲在 旃蒙赤○○…’으로 시작하는 데 최루백이
사망한 연대를 표시한 것이다. 여기에서 ‘전몽(旃蒙)’은 ‘고갑자(古甲子)’에서 ‘을(乙)’을 뜻한다. 또한 ‘적○○(赤○○)’은 ‘적(赤)’ 외에는 글자를 알아볼 수 없으나 ‘고갑자’를 살펴보면 ‘적’으로 시작하는 것은 ‘적분약(赤奮若)=축(丑)’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토대로 그가 죽은 시점이 ‘을축년’이고 그의 생애로 미루어보아 1205년
(
희종 1년)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태어난 때는 언제일까? 이를 위해 그의 아내 염경애의 묘지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묘지명에서 아내가 자신의 돌아가신 아버지를 모시지 못해 해마다 제사를 지낸 사실을 감사한다고 쓰여 있다. 아버지 최상저는 최루백이 15세 때 호환으로 돌아가셨으며, 최루백은 3년동안 시묘살이를 했으니,

그 이후에나 결혼을 했어야 했다. 염경애가 25세에 출가를 했고, 1146년에 4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으니 그녀는 1100년에 태어났고, 1124년에 최루백과 결혼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최루백이 부친상을 치르고 나서 바로 결혼을 했다고 가정한다면 최루백 나이 19세에 혼인을 했을 텐데, 이를 통해 최루백의 태어난 해를 추적해보면 1106년이 된다. 게다가 혼인을 더 늦게 했다면 최루백은 1
0
0살이 넘게 살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고려사'에는 수주(水州:고려시대 수원의 명칭)의 한 할머니의 나이가 104세였다는 내용이 있으니, 최루백이 100살 넘도록 살았다는 것이 거짓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두 묘지석 자료만을 가지고 최루백이 100살이 넘도록 살았다고 하기에는 아직 의심의 여지가 남아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도 수원사람 최루백이 아내 염경애를 존경하고 사랑했으며, 검소하고, 부모에 대한 효심이 깊었기에 100살이 넘도록 장수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크게 문제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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