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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수원의 문화공간
게시물 상세보기
팔달산
등록일
2010.07.30
작성자
수원박물관
조회수
4564
첨부파일
<p>한 도시를 상징하는 지형지물은 그 지역민의 일체감과 자부심의 원동력이다. 근대 도시공간학적 측면에서 한 도시를 상징하는 랜드마크(Land Mark)는 많은 돈을 투자하고서라도 획득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예를 들면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과 미국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호주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 등과 같이 한 도시를 상징하는 건축물은 도시의 상징이자 자부심이며 도시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어떠한 시대를 보다 잘 이해하는 방법은 그 시대의 정신과 문화적 지향을 보여주는 상징물을 파악하는 일일 것이다.</p> <p>수원을 대표하는 상징적 공간은 팔달산이다. 팔달산은 ‘팔닥산’으로 불러야 제맛이 난다. 실상 수원토박이들은 팔닥산으로 불렀고, 그렇게 불러야 무언가 살아 있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수원에서 팔달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다. 팔달산은 상징의 공간이자 신성 구역이었다.</p> <p>● 선사문화</p> <p>팔달산은 청동기 시대부터 이 지역에 사람이 살았음을 보여준다. 팔달산 남동쪽 기슭에 4기의 고인돌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는 수원지역 선사문화를 밝히는 데 귀중한 자료로 1991년에 경기도 기념물 제125호로 지정되었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우리나라에 3만개가 넘게 남아 있다. 전 세계 고인돌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p> <p>이는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고인돌 문화’를 일궈왔음을 뜻한다.</p> <p>팔달산 중턱, 이 일대를 굽어 볼 수 있는 자리에 서 있는 고인돌은 조성집단의 권위와 위용을 잘 드러낸다. 그렇게 팔달산은 이미 청동기 시대부터 주목의 대상이자 신성한 상징의 공간이 되었다.</p> <p>● 고려·조선</p> <p>고려말 학사 이고(李皐) 선생은 이곳 탑산(팔달산)에 은거하며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과 지조를 보여주고자 하였다. 팔달산을 저항과 은둔의 상징으로 활용한 셈이다.</p> <p>팔달산이 역사속에 새롭게 부각된 것은 1789년 수원읍치를 이곳 아래로 옮기면서부터이다. 팔달산 동쪽으로 수원부를 옮기면서 팔달산은 수원의 주산(主山)이 되었다. 더욱이 산의 남쪽과 북쪽에 향교(鄕校)와 사직단(社稷壇) 및 산 중턱에 성신사(城神祠)를 설치함으로써 그 상징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정조의 왕명으로 화성을 지키는 성신(城神)을 모시는 성신사에 매년 향축을 내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팔달산은 정조 사후 정조의 사당인 화령전(華寧殿)의 주산으로 인식되면서 더욱 신성성이 강조되었다.</p> <p>정조 이래 팔달산에는 소나무를 심어 보호함으로써 낙낙장송이 우거진 명산으로 수원의 자랑이 되었다. 이에 수원의 봄·가을의 아름다움을 춘·추8경으로 꼽았는데, 그 가운데 추8경 가운데 ‘서성의 매사냥’과 ‘화양루의 눈오는 감상’이 팔달산과 관련이 있다. 정조의 사랑을 받았던 단원 김홍도의 그림에도 팔달산과 관련하여 ‘미로한정에서 국화감상(閑亭品菊)'과 ’서장대 일대의 사냥(西城羽獵)’ 그림이 남아있다. 또한 한말 이후 정리된 것으로 보이는 ‘수원8경’은 화성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내고 있다. 이 가운데 ‘팔달청람(八達晴嵐)’은 팔달산의 아름다운 정취를 자랑하고 있다.</p> <p>한편 조선후기 이래 팔달산은 수원읍민을 지켜주는 수호신적인 위상과 더불어 수원의 상징이 되어갔다.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1876년(고종 13) 수원지역은 봄 가뭄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모내기철에 비가 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수원부 유수 송근수(宋近洙), 수원 판관 민두호(閔斗鎬), 중군 이규안(李奎顔), 영화도 찰방(迎華道察訪) 김면유(金勉孺) 등이 사직단·팔달산·광교산·용연·축만제·성신사 등 6곳을 돌며 교대로 계속하여 기우제를 지냈다. 사직단·성신사 및 수원의 주산(主山)과 진산(鎭山)인 팔달산·광교산 그리고 용신(龍神)이 있다고 믿었던 물가로서 용연과 축만제가 기우제 설행 장소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팔달산과 성신사는 수원의 기우제 설행장소로 활용될 만큼 수원을 지키는 신성한 장소였던 것이다. 성신사 건립 이래로 국가적 향사의 대상으로서 성신사의 위상은 확고부동한 것이었다. 이는 한말까지 지속되었다.</p> <p>● 일제강점기</p> <p>그러나 1910년 일제에 의한 한국강점 이후 팔달산에는 수원신사(水原神社)와 일본군인 기념비와 국기게양대 등이 설치되었다. 이는 조선의 정신적 상징인 향교 위쪽으로 신사를 높게 세우면서 팔달산에 대한 조선인의 신성성과 상징성을 허무는 일을 자행하였다. 더욱이 일본인 군인인 고시(古志)소좌 기념비를 팔달산에 세우고, 일장기가 펄럭이는 국기게양대를 팔달산 정상에 세우는 등 팔달산의 상징을 일본화하고 있다. 향교 옆 일본인소학교와 향교 위 수원신사, 팔달산을 바라보면 펄럭이는 일장기 등은 팔달산의 상징을 일본화하는 것이었다. 팔달산에 위치한 ‘고시소좌 의사지비(古志少佐義死之碑)’는 일본인소학교에 있던 ‘니노미야 손도쿠(二宮尊德) 동상’과 방화수류정 옆 중포산의 ‘노구찌 순직비(野口廣三 殉職碑)’와 더불어 수원에 있는 일본을 상징하는 대표적 조형물이었다.</p> <p>일본군인 기념비는 국기게양대의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교동에서 팔달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등산로에 위치하였다. 청일전쟁이 발발한 1894년 7월 27일 오전 5시 수원 성내에서 자결한 고시 마사츠나(古志正綱) 소좌를 기념하는 비였다. 그는 청일전쟁에서 1894년 7월 25일 풍도(豊島) 앞바다의 해전을 이기고 난 뒤, 7월 29일 성환(成歡) 전투를 앞두고 수원에서 성환으로 가던 중 수원에서 자결한 자였다. 일본군 제21연대 제3대대장이었던 그는 징발한 조선인과 말이 도망쳐서 출발에 지장을 초래하자, 청군과의 운명을 건 중요한 전투가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 제 때 출발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자결한 것이다. 그의 행위는 성환전투에서 일본군의 승리로 마감됨에 따라 의로운 죽음으로 미화될 수 있었다. 따라서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로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청일전쟁의 승리에 대한 일본인들의 열광은 당연히 수원에서 죽었던 그를 역사에서 불러내 팔달산 중턱에 기념비를 세웠던 것이다. 근대 일본의 성취의 발판을 되새기는 훌륭한 기제가 되었던 셈이었다.</p> <p>한국인들이 이러한 일본적인 상징물에 대한 훼손을 통하여 저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41년 봄 일제의 군국주의적 발악이 극에 달하던 시절 일본군인 고시(古志)소좌기념비에는 조선총독 미나미(南次郞)와 일본타도 및 대한독립을 주장하는 내용의 낙서가 되어 있었다.</p> <p>‘미나미를 주살하라, 황국신민은 무어냐?’, ‘죽음으로 미나미를 박살내자. 우리들은 대한국민이다’, ‘대한 만세’, ‘타도 일본, 대한만세, 독립청년군’, ‘우리들 대한국민은 일치단결하여 대한독립을 이루자’ 등의 내용이었다. 이는 읍내에 사는 나홍석의 아들 나석균(羅奭均·21)의 거사였다. 고모 나혜석의 영향 탓인지 모르지만 그림에 취미가 있었던 그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의식있는 청년이었다.</p> <p>이렇듯 일본적 상징물에 대한 훼손은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를 의미한다. 이는 1945년 해방이 되면서 한국인이 제일 먼저 한 것이 일본인들이 세운 기념비와 동상 및 신사를 불지르는 것이었다. 또한 일본인들은 팔달산에 공원을 조성함으로써 팔달산에 대한 조선인의 신성한 이미지를 전혀 다른 양상으로 바꾸어 버렸다. 소나무 울창했던 팔달산에 단풍나무와 벚나무를 심는 것이었다. 이러한 팔달산공원화 계획은 팔달산을 오락과 여흥의 일상적 공간으로 만들어냄으로써 팔달산의 신성한 상징성과 의미를 변질시켰던 것이다.</p> <p>● 해방과 전쟁</p> <p>해방과 더불어 팔달산은 새로운 상징공간으로 변화되었다.</p> <p>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7월 ‘공군용사 고성조 공적비’가 공군정찰대에 의해 팔달산 서쪽에 세워졌고, 1965년 9월 28일 청우회 수원지부가 주관이 되어 ‘6·25참전기념비’를 팔달산에 세웠다. 9·28서울수복을 기념한 셈이다.</p> <p>● 현재</p> <p>1968년 수원시민의 날인 10월 15일 홍난파 탄생 70주년을 기념하여 ‘난파노래비’가 팔달산 동편에 세워졌고, 이듬해인 1969년 3·1운동 50주년을 기념하여 삼일동지회에서 건립한 ‘삼일독립운동기념탑’이 팔달산 정상에 세워졌다. 이와 함께 동공원에 있던 ‘대한민국독립기념비’를 이전하였다. 이 비는 수원시민과 학생일동이 대한민국의 광복을 기념하기 위하여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수립을 맞춰 동공원의 노구찌 순직비를 부수고 그 비좌 위에 세웠던 것이다. 이에 1969년 팔달산 정상에 이전, 3·1독립운동기념탑과 함께하고 있다.</p> <p>한동안 팔달산 하면 강감찬 장군 동상을 떠올렸다. 팔달산 중턱에 우뚝하게 서 있던 동상은 1971년 6월 29일 애국조상건립위원회(愛國祖上建立委員會)와 서울신문사가 공동주관하여 기공, 1972년 5월 4일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강감찬 장군이 위대한 역사적 인물이지만 수원과 관련 내용을 찾을 수 없고, 동상이 서 있는 자리가 성신사 터였지만 아무도 이에 대하여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였다. 당시 우리의 문화수준이 그 정도였다. 강감찬 장군 동상은 현재 광교저수지 입구 광교공원으로 이전되었고 대신 성신사가 중건되었다.</p> <p>한편 1975년 어린이날을 맞아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비‘가 건립되었고, 1978년 12월에는 ‘자연보호 헌장비’가 강감찬 장군 동상 옆 비둘기 집 아래쪽에 건립되어 어린이와 자연보호에 대한 당시의 관심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p> <p>현재 팔달산에서 가장 웅장하고 확실한 상징물은 정조대왕 동상이다.</p> <p>청동기시대 고인돌이 서 있던 신성함으로 시작된 팔달산의 상징공간은 조선시대에는 향교와 성신사와 화령전,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을 위한 상징물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시대의 의미를 보여주는 것들이 서 있는 상징공간이다.<br /> <br /> 작성자 : 수원박물관 한예연구사 한동민</p>
☏ 031-228-4150
페이지 만족도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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