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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수원의 문화공간
게시물 상세보기
신풍학교
등록일
2010.07.30
작성자
수원박물관
조회수
5217
첨부파일
수원군공립학교.jpg(66kb)
신충초교.jpg(44kb)
<p>● 학교의 의미</p> <p>사람의 삶에서 공동체적 연대감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지역적 연결고리, 즉 지연과 더불어 학교를 통한 학연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어린시절 공통된 경험과 기억의 공유는 한 지역의 일체감을 형성하는 커다란 동력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초등학교의 경험은 중요한 기억의 공유로 작용한다. 마을 유지의 사랑방에 끼리끼리 다니던 서당(書堂)에서 근대 교육기관으로 학교(學校)가 설립, 운영되면서 학교는 마을의 또래와 이웃을 넘어 새로운 인간관계와 공간적 사유의 확장을 가져왔다. 그 낯선 경험을 통해 지역의 확장과 사회적 인간관계의 확장을 가져오는 계기였다.</p> <p>지금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지만 2~3대에 걸쳐 같은 학교를 다녔다는 경험의 공유는 혈연적인 결속 이상의 강렬한 지속적 연대감을 갖게 한다. 따라서 지역 공동체로 기능하는 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을 넘어 서는 것이었다. 봄 소풍이나 가을 운동회 등은 단순한 학교행사가 아니라 인근 지역의 행사이자 기쁨이었다. 따라서 오랜 전통의 학교는 지역의 일체감을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과 더불어 커다란 자부심이 되었다. 수원에서 이러한 역할을 하는 가장 오래된 학교는 신풍학교였다. 어린시절, 아련한 기억 저편에 펄럭이고 있는 추억의 상당부분은 벗들과 학교 다닐 때의 그것들이다. 그것의 이름이 소학교, 보통학교 혹은 국민학교와 초등학교로 바뀌었을 뿐이다.</p> <p>서당을 배움의 전부로 알던 사람들에게 근대적 ‘학교’의 탄생은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시간에 의해 규제되고 책상에 앉아 칠판을 향하여 규격화된 태도로 선생님의 수업을 듣는 방식은 근대적 인간을 양성하는 기제이기도 했다.</p> <p>● 수원군 공립소학교(水原郡公立小學校)</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공립소학교" src="/upload_file/fckeditor/image/수원군공립학교.jpg" /></p> <p>▲ 1986년 2월 10일 '수원군 공립학교'가 화성행궁이 객사였던 우화관을 교사로 개교했다.</p> <p>수원 최초의 근대적 학교인 수원군공립소학교가 만들어졌던 1896년(건양 원년)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과 욕구가 들끓었던 시절이었다. 최제우에 의해 동학(東學)이 창도되고 갑오농민전쟁과 청일전쟁 및 갑오개혁 등이 숨가쁘게 전개되고 있을 때였다. 농민에 의한 아래로부터 혁명적 요구와 위로부터의 개혁은 외세와 결탁한 수구세력에 의해 좌절되었고, 지속적인 서세동점(西勢東漸)은 위정척사 운동과 자강운동의 출현을 가져왔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따라 새로운 지식을 배워야 한다는 의식과 더불어 근대적 학교의 설립 운동이 펼쳐졌다.</p> <p>1895년 지덕체(智德體) 함양을 골자로 하는 고종임금의 ‘교육조서(敎育詔書)’를 통한 신교육 정책에 따라 1895년 7월 19일 ‘소학교령(小學校令)’이 제정 반포되었다. 이에 서울의 관립 소학교를 비롯하여 전국 관찰부 소재지마다 공립학교가 설치되었다. 이에 수원에서는 1896년 2월 10일 ‘수원군 공립소학교(水原郡公立小學校)’가 화성행궁의 객사였던 우화관(于華館)을 교사로 하여 개교하였다. 이는 수원지역 최초의 근대적인 교육기관, 즉 신식학교였던 셈이다. 2년 뒤인 1898년 남양공립소학교가 설립되었다.</p> <p>● 경기관찰부 공립소학교(京畿觀察府公立小學校)</p> <p>애초 수원군 공립소학교로 명명되었던 것은 1895년 5월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전국을 23부로 나누고 337개 군으로 편재했을 때 수원부는 수원군으로 강등되어 인천부에 소속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896년 13도제를 채택하면서 수원은 다시 경기도관찰부가 되었다. 이에 따라 ‘수원군 공립소학교’는 ‘경기관찰부 공립소학교(京畿觀察府公立小學校)’로 이름을 바꾸었다. 지방제도 개편에 따른 명칭 변경이었던 셈이다. 1896년 9월 당시 전국적으로 공립소학교는 36개가 설치되었다. 학교는 설립 주체에 따라 관립·공립·사립으로 구분된다. 관립은 중앙정부가 주체가 되어 한성지역에만 설치되었고, 공립은 지방 관청의 주도로 설립되었다. 그 결과 공립소학교는 1895년에서 1904년까지 전국 각처에 99개나 설립되면서 근대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p> <p>경기관찰부 공립소학교는 지방 관청의 지원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에 1901년 9월 경기관찰사 조중목(趙重穆) 300냥, 수원군수 김용진(金容鎭) 100냥, 영장 신좌균(申佐均) 100냥, 사계(射契) 50냥 등 총 550냥을 경기관찰부공립소학교 수리비 보조금으로 내놓고 있다. 관찰사와 군수 및 영장 그리고 활쏘기 모임인 사계에서 학교 수리비를 보조했던 것이다.</p> <p>또한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이 도모되기도 하였다. 1903년 학부(學部)는 각 군의 공전(公錢)에서 학교 보조비를 지급하라는 훈령을 내리고 있다. 경기관찰부공립소학교를 비롯하여 관찰부가 있는 전국의 13도와 13부(府) 및 각 군의 공립소학교에 각각 360원(元)을 지급하도록 했다. 그러나 인천부의 인천항 일어학교(仁川港日語學校) 1,080원 그리고 동래부 동래 개성학교(東萊港開城學校) 1,200원을 특별지급 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의 영향력이 증대되는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p> <p>공립학교 설립 흐름에 따라 의무교육에 대한 의식이 싹트면서 대한제국기 전국적으로 많은 공립학교 및 학교 설립운동이 펼쳐졌다. 수원에서는 1900년 성안 신풍동에 사립 화성학교(華城學校)가 설치되었고, 1902년 설립된 종로교회에서는 매일학교로 삼일학교(三一學校)를 운영하였다. 또한 천주교의 경우 1904년부터 수원읍의 유지들이 협의하여 황학정(黃鶴亭) 정자와 그 터를 매수하여 임시 성당과 화양학교(華陽學校)를 설립하고 남녀 아동 200여 명을 교육 양성하였다. 이후 천주교는 용주사에 이 터를 매각함에 따라 수원포교당이 자리하였다. 용주사 역시 승려의 자질 향상과 인근지역 아동을 위하여 1906년 용주사에 명화학교(明化學校)를 설치하였다. 설립 초기 학생은 50명으로 보통과와 일어를 가르쳤다. 특히 일어는 현지에 거주하는 일본인 기무라(木村淡泊)가 담당하였다.</p> <p>당시 국가적 차원에서 교육은 공립학교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나 주민들의 호응은 그리 높지 않았다. 이에 개화자강론자들은 사립학교를 통해 시대적 추세에 대한 변화에 대응하고자 했으나 역시 전반적으로 부진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1905년 이후 각종 자강단체들의 지회조직들이 만들어지고 활성화되면서 각 지역의 유지들은 근대적 교육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하여 자각하면서 사립학교 설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하였다.</p> <p>● 수원공립보통학교(水原公立普通學校)에서 신풍국민학교(新豊國民學校)까지</p> <p>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소위 ‘을사보호조약’의 체결하면서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이에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은 더욱 심화되었지만 일제는 1906년 9월 18일 학부령 제28호로 한성부 및 각도 관찰부공립소학교는 공립보통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에 경기관찰부공립소학교는 ‘수원공립보통학교(水原公立普通學校)’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기존의 소학교는 이후 일본인들이 다니는 학교만이 ‘소학교’라 불렸고, 조선인에게는 ‘보통학교’를 사용하게 했다. 일본인의 학제는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로 불렀고, 조선인의 그것은 한 단계 낮은 형식으로 보통학교(普通學校)- 고등보통학교(高等普通學校)- 실업학교(實業學校) 및 전문학교(專門學校)로 불렀다. 이러한 차별과 이중적인 체계는 식민통치의 기본적인 운영 메카니즘이었다. 이러한 민족적 차별은 1907년 6월 수원공립보통학교의 김병천 등 학생들은 당오전 5,787냥5전을 국채보상비를 갹출하도록 만들었다. 수원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셈이다.</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신풍초등학교" src="/upload_file/fckeditor/image/10.jpg" /></p> <p>▲ 1996년 '신풍초등학교'로 이름을 바꿨다.</p> <p>수원공립보통학교는 6년제로 인근의 4년제 학교를 마친 학생들은 다시 5~6학년으로 진학하는 형태였다. 수원지역에서 6년제 공립보통학교는 수원·남양·오산 등이었고 나머지 학교는 4년제였다.</p> <p>1919년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기존의 무단적 통치에 대한 한계를 인식하고 보다 세련된 형태의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나섰다. 집회·결사의 자유를 억압하던 정치에서 보다 세련된 통치형태로 일본 동화주의 및 내선일체(內鮮一體)를 획책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교육도 이러한 맥락에서 3개 면(面)에 1개 공립보통학교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여 민심을 추스르고자 하였다. 이후 1927년부터 1면 1교 계획을 세워 추진하였다. 당시 수원군에는 1896년에 개교한 수원공립보통학교를 비롯하여 남양공립보통학교(1898년), 오산공립보통학교(1913년) 이외에 팔탄·태장(1922)을 위시하여 반월·삼괴·동탄(1923년), 안룡(1924), 송산·향남(1926), 정남(1930), 비봉·양감(1931), 서신(1932), 봉담·매송(1933), 마도(1935), 고천(1936) 등이 차례로 개교하였다.</p> <p>1938년 4월 교육령 개정에 따라 공립보통학교는 일본인의 학교 이름인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로 이름을 바꾸었다. 동시에 학교에서 일본어 상용을 강제하였다. 이와 함께 수원공립보통학교는 일본인 ‘수원공립심상소학교’가 있다는 이유로 이름을 ‘신풍심상소학교(新豊尋常小學校)’로 바뀌었다. 수원이라는 명칭을 일본인 학교에 부여함에 따라 수원공립보통학교는 그 이름을 빼앗긴 셈이다. 이미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민족문화를 말살하기 시작한 일제는 일본인과 조선인이 하나라는 허구적 슬로건 아래 일본 천황의 백성, 즉 ‘황국의 신민’의 국민(國民)을 길러낸다는 의미에서 1941년 4월 심상소학교는 ‘국민학교(國民學校)’로 만들었다. 이에 ‘신풍국민학교(新豊國民學校)’가 되었고, 그렇게 해방을 맞이하였다. 1996년 ‘신풍초등학교’로 이름을 바꿀 때까지 그 이름을 지속하였다.</p> <p>100년도 채 되지 않아 “너, 몇 회냐?”, “예, ○○회 입니다” 라는 대화가 점점 사라지는 현대판 유목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br /> <br /> 작성자 : 수원박물관 한예연구사 한동민</p>
☏ 031-228-4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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